이보성(이하 이): 우선 작가님을 잘 모를 구독자들을 위해 전시경력 등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강태훈(이하 강): 안녕하세요. 부산에서 1999년부터 전시하고 작업하고 있는 강태훈입니다.
개인적 차원의 경험을 통해 전체주의와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한 《내 머릿속의 수도꼭지》 (대안공간 반디, 2006), 사회가 가진 악의적인 믿음과 환상에 대해 다룬 《SOCIAL PLACEBO》 (오픈스페이스 배, 2008),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반복되는 역사에 대한 《재단된 환상》 (수가화랑, 2013), 결혼 문제와 국가의 인구문제를 연구한 《모호한 중력》 (KAF 미술관, 2015), 시대의 어둠 속, 삶과 죽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 《깊고 어두운 밤의 잔여》 (공간 힘, 2016), 《어떤 믿음에 대하여》 (아마도 예술 공간, 2018) 등 8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부산시립미술관, 2006), 《Reality bites》 (카프리스혼 갤러리, 베를린, 2007), 《광주비엔날레: 연례보고》 (광주비엔날레, 2008), 《오래된 미래》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2008), 《'악동들, 지금 여기'》 (경기도 미술관, 2009), 《부산비엔날레: 진화 속의 삶》 (부산시립미술관, 2010), 《안녕 없는 생활들, 모험들》 (부산시립미술관,2011), 《Antagonistic Monument》 (아마도 예술공간 2016), 《평창비엔날레: 다섯 개의 달》 (강릉 녹색도시 체험센터, 2017), 《OCTOBER》 (아르코미술관, 2017), 부산현대미술관 개관전 《미래를 걷는 사람들》 (부산현대미술관, 2018)등 국내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습니다.
독일 베를린 Gallery Caprice Horn의 전속작가(2007-2011)를 지냈고 현재 동의대학교 디자인 조형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이: 선생님은 부산에서 살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만, 부산에서보다는 서울 등 부산이 아닌 지역에서의 활동이 더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강: 그런가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지역에서의 활동이 미비한 것 같은데요. (웃음) 요즘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워낙 폭 넓게 활동하셔서요. 전 주로 부산에서 작업하다가 다른 곳에서 연락이 오거나 외부에서 부산에 찾아오시면 그것을 통해 한 번 씩 전시하는 편이었습니다. 제가 나서서 먼저 찾아다닌 적은 없었고요. 하지만 그런 것을 누군가 대신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습니다. 일종의 매니지먼트 같은 거요. 그 당시 대안공간이 그런 역할을 해준 것 같습니다. 물론 저 하나를 위한 건 아니었지만요. 그 안에서도 공모나 심사 같은 게 있었으니까요. 요즘은 레지던시 같은 것들도 많지만 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런 것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가지기보다 주로 텍스트를 보거나 계속 파고들면서 사유하는 유형이어서요.
타 지역에서 활동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독일에서 전속작가 했을 때랑 광주비엔날레 참여했을 때 같네요. 독일은 연고가 없었는데 그때 대안공간에서 다른 나라에 있는 갤러리에 부산 작가들 소개하는 책자를 보냈었는데, 그걸 보고 베를린에 있는 갤러리에서 연락이 와서 전속작가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갤러리에서 하는 단체전과 ART Cologne 같은 해외 아트페어에 주로 참가 했습니다. 아무튼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금융위기 전 신자유주의의 환상과 버블로 가득 찬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광주비엔날레는 그때 디렉터가 얼마 전 타계한 오쿠이 웬위저였는데요. 전시를 위해 부산을 방문해 작가 리서치를 하던 중에 제 포트폴리오를 보고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도 알았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전시 기획이 무엇이고 예술과 정치가 어떻게 관계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는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 이처럼 다양한 곳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했고, 각각 나름 성공적이었다면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활동들이 여타의 같은 이력을 지닌 작가들과는 다르게 지속적이진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거리에 따라 커뮤니티 등 형성이 어려워서이었을까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지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강: 아무래도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큰 것 같습니다. 가난했으니까요. 그때는 지금처럼 문화재단 같은 기관들도 없어서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외국의 경우는 언어의 문제가 컸던 것 같습니다. 전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처럼 모국어밖에는 못 해서요. 그때 갤러리 마담이 독일 교포와 결혼하라고 권유한 게 생각나네요. (웃음) 또 제가 사교성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뭔가를 만들지 않습니다. 학연, 지연 이런 것에도 염증을 느끼고요. 그리고 그 당시 타 지역에서 어울릴 만한 사람도 못 만났습니다. 독일 활동의 경우는 같이 일한 곳이 상업 화랑이라 제가 추구하는 아이디어랑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해외 페어를 돌아다니는 것도 고역이고요. 전 스스로 내 길이 아니다 생각되면 가질 않았습니다. 그땐 어려서 그런 부분에 미숙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웃음)
과거 같이 전시했던 몇몇 큐레이터들과는 지금도 잘 연락하고 같이 전시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영향력 있는 큐레이터들이 되길 바라면서요.
이: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으로 들어가서,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면 매번 바뀌고 변화하고 있지만, 크게는 세 번의 변곡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여러 물건들을 브리콜라주하던 시기, 그리고 수도꼭지를 소재로 활용하며 일명 '수도꼭지 작가'란 명칭을 주었던 시기, 그리고 다양한 매체들을 활용하고 있는 지금. 이렇게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강: 뭐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틀리겠지만 재료나 형식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렇게 구분될 수도 있겠네요. 그 세 번의 변곡점에 생각이나 입장이 바뀐 것이 감각적으로 드러난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연구자가 하는 제 작품들에 대한 분석과 비평의 영역이지 제가 가타부타 개입할 영역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 그렇군요. 형식의 변화만을 가지고 변곡점으로 잡아 선생님의 작품 시기를 구분한 것이 죄송하게 느껴지네요. (웃음) 어쨌든 그럼에도 저 구분에 기초해서 선생님이 각각의 시기에 가졌던 생각들이 무엇이며, 변한 이유가 무엇이었지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다시 시기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강: 처음 브리콜라주 하던 작업들을 한 시기는 학부, 대학원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물을 통해서 인간을 이야기하는 작업들을 했습니다만 형식적으로 아카데믹한 작업들이 많았습니다. 잠깐 옛날이야기를 하자면 아무래도 그 당시 미술교육은 한국의 반공 이데올로기적인 정치 상황 아래 우경화되고 보수적이었으며 미술의 아방가르드 한 운동들, 예를 들어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 같은 것들이 그 정치적인 것들의 내용들을 삭제시킨 체 왜곡된 형태로 교육되었습니다. 또 제대로 가르쳤다 한들 이미 오랜 시간 사회적 상징체계 안에서 있으면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인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서구의 영향으로 형식이나 매체 특정성(그것도 오역되고 왜곡된)을 중시하고 정치성을 가지는 미술 자체는 터부시 하는 풍토가 강했습니다. 지역의 미술계 사람들도 보수적인 분들이 많았고 변질된 예술적 도그마를 학생들에게 강요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자율적으로 공부 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고 그나마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오신 선생님들 중에 소수가 그런 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정보와 도움을 주신 것 같습니다. 막 인터넷이 활성화 되는 시기였고 외국서적을 직접 구해서 번역해 보거나 번역서들이 많이 출판되기 시작하면서 동시대 미술에 대해 공부하기가 수월했습니다. 그 당시엔 숨 막히는 이 폐쇄된 공간에서 벗어나 어떻게 동시대 미술을 할 수 있을까가 제 머리 속을 채우고 있었으니까요. 그 당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서들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두 번째 시기는, 그러니까 일명 수도꼭지 시기는 학교를 떠나 처음으로 한 개인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집약해서 전시를 해보고픈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생활고에 시달려서 《내 머릿속의 수도꼭지》 전시를 마지막으로 미술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내가 솔직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무엇에도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해보자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잃을 게 없으니까 일종의 배수진 같이 된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이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한 사물과의 관계를 가지게 되느냐는 모티브였고, 그런 강박을 시각적으로 정치적인 것과 연계해 변주하고 표현했었죠. 또 형식상으론 일종의 미술 시장과 미술이 상품화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있었고요. 그런데 제가 표현이 미숙했는지 몰라도 그 클리셰를 그 당시 평론하던 사람들 중엔 마치 평생 수도꼭지 붙이면서 브랜드화해서 먹고 살 사람이라고 매도한 사람도 있었죠. (웃음) 그 전시에 국내외 10명 정도의 평론가들이 글을 적었던 것 같네요. 지역의 미술협회 사람들 중에 제 작품 보고, 그런 작품하면 매장시키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형식적인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비판한 작업을 두고 신자유주의 민주정권 출범에 맞추어 반대로 그걸 찬양하는 작품이라고 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제가 서툴렀거나 그들이 제가 생각하는 입장과는 다른 입장에 있어 그것을 못 읽었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요. 뭐 이 사람들 여전히 지역에서 평론하시고 또 지역 기반으로 기득권 가지고 살고 계십니다. (웃음) 아무튼 그런 불만 때문에 독학으로 공부는 열심히 했습니다. 사람들이 작품은 쉽게 하면 쉽게 한다고 불평, 어렵게 하면 어렵게 한다고 불평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 뒤론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예술가는 똥을 싸는 사람이지 그게 어떤 똥인지 설명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주변에 소수는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힘이 되었습니다. 또 내가 발붙이고 사는 곳보다 다른 곳에서 이를 테면 외국에서 더 작품을 공감해 주셔서 힘든 시기를 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제 후진적으로 ‘수도꼭지’ 작가로 부르는 사람들은 없어졌습니다. 저를 ‘개념미술’ 작가로 부르는 무식한 분들도 계시는데, 그분들도 사라졌으면 합니다. (웃음)
(좌) 구명환, 2005, 혼합재료, 80x80x23cm / (우) 치명적 오류, 2006, 혼합재료, 135x45x100cm
이: 잠시 만요. 숨이 차서요. (웃음) 한 번 끊고 다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초현실주의에서 정치적인 내용은 쏙 빼고 형식적인 것, 그러니까 꿈의 세계를 그린다라든지 자동기술법이다 등만을 가르치는 선생들에 대한 비판이 많이 공감되네요. 저도 학교 다닐 때, 그런 선생들 때문에 예술에 대해 한참을 잘못된 관념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수정하기까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요. 한 번 만들어진 관념은 쉽게 고쳐지지가 않더라고요. 지금도 그 선생들을 생각하면 분노랄까 그런 감정이 치밀곤 합니다. (웃음)
아! 그건 그렇고, 말씀 중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수도꼭지 작품을 두고 “한 인간이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한 사물과의 관계를 가지게 되느냐라는 모티브였고, 그런 강박을 시각적으로 정치적인 것과 연계해 변주하고 표현”한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 작품이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궁금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도 의문을 가질 것 같아서요.
강: 돌아보면 여러모로 한국 현대사에서 분기점이 되어버린 1987년인데요. 군사정부는 88올림픽을 1년 앞두고 준비하는 차원에서 스포츠 행사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저는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부산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매스게임에 동원됐습니다. 경기장 인근 초등학교 3개가 수업은 하지 않고 대통령 방문에 맞춰 더운 날 연습에만 매달렸습니다. 지금 보면 공산국가의 매스게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완성도가 떨어졌습니다만 아침부터 오후까지 반복되는 연습을 하다가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우르르 수도꼭지로 달려가 물을 마시던 장면이 제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었고 어린 날의 경험과 기억 속에 국가라든지 시스템이라든지 권력이란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비판적으로요. 그 후로 시간이 지나도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살다보면 삶에서 내몰릴 때가 있는데요. 군대 혹은 노동 현장 같은 곳에서요. 그래서 시스템 안에서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위치를 가지느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사회가 가지는 상징적 질서에 개입하거나 사물의 실질적인 관계를 변형시키고 싶었습니다. 한 가지 사물에 대한 상징은 사실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꼭지 자체는 악의적인 사회적 상징을 해방시키거나 무한대의 상징을 고정 시키는 역할이었습니다. 양가적으로 작동한 것이겠지요. 전시를 통해 비판하고 언급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 국가, 전체주의, 대의 민주주의, 소유관념, 그 안에서 인간과 믿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인 즉, 수도꼭지를 통해서 군사정부를 비롯 전체주의 등을 사유했다는 말씀이시죠? 그래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제가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매스게임 등 획일화된 국민을 양산하는 고역에 동원된 아이들이 잠깐의 주어진 쉬는 시간에 우르르 달려가 수도꼭지에 매달리며 목을 축이는 모습을 보며 시스템이 인간을 어떻게 길들이는지 보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면서 수도꼭지를 일종의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보면 될까요? 물론 선생님 작품에서 그 수도꼭지란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만나면서 변주를 꾀하고 그러지만요.
강: 그렇게 보이시나요? 해석하는 것은 관람자의 몫인지라 제가 참견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은 아니지만, 시스템이 인간을 길들이는 방법으로 수도꼭지를 사용했다기보다는 조금은 다른 의미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제가 《내 머릿속의 수도꼭지》전을 할 때는 서울에 계셨죠? 전시를 직접 보셨으면 다르게 이해하셨을 텐데, (웃음) 아마 추측컨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보성 큐레이터가 가지고 있는 전체주의에 대한 관념과 그 작동방식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다시 이야기해도 동어반복이 될 텐데요. 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쉽게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보죠. 무엇을 설명하는 것에 재주는 없지만요.
저에게 수도꼭지는 앞서 언급한 매스게임의 고역처럼, 제 삶이 어느 정도 극단에 내몰릴 때면 항상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저에게 일종의 환희 같은 쾌감을 선사했는데,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는 물신화된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작업노트에 수도꼭지를 ‘성배’라고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 표면의 매끄러움이 주는 초현실적인 감각도 있고요. 수도꼭지는 물을 사람에게 공급해주는 한낱 사물에 불과하지만, 나의 경우와 같이 특수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것은 쓰임에 충실한 사물이 아닌 다른 의미의 오브제로 나타나게 되는 거죠. “한 인간이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한 사물과의 관계를 가지게 되느냐라는 모티브”였다는 말은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강박을 시각적으로 정치적인 것과 연계해 변주하고 표현”했다는 말은, 이것에 착안해 수도꼭지를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또는 해방되는 오브제로 인식하고 작품에 변용해서 사용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꼭 그 한 가지 상징으로만 사용한 것도 아닙니다. 수도꼭지를 틀고 잠글 수 있는 것처럼 작품의 맥락에 따라 해방의 기제가 되기도, 또 억압의 기제가 되기도 합니다. 양가적이라고 말한 건 그런 의미이고요. 마지막으로 전시를 보시면 수도꼭지가 여러 가지 다른 사물들과 결합해있는 걸 알 수 있는데, 꼭 전체주의만을 정치적 타개 대상으로 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튼 수도꼭지는 그렇습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니까 무언가 얄팍해진 느낌이 있는데, 다른 것들은 비평가나 미술 담론을 생산하시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걸로 하죠.
이후 저는 담요를 비롯하여 확성기, 새장 등 다양한 사물들을 작품의 오브제로 활용해왔는데, 이 역시 수도꼭지를 사용한 것과 같은 느낌으로 보셔도 될 것 같네요. 아! 그러고 보니, 한때 어느 비평가가 저보고 수도꼭지를 마치 만능통치약인양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전시의 통일성을 위해 선택한 방식이 그렇게도 이해될 수 있구나 신기해하면서 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이: 아! 그렇군요. 이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것들을 바탕으로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니까 수도꼭지와 결합한 각각의 사물들이 왜 그 사물이어야 했는지 납득이 되네요. 그런데 이 수도꼭지라 것이 제 세대까지만 공유할 수 있는 상징이란 생각도 드네요. 살아가는 환경이 지금의 아이들도 제 세대 그리고 그 윗세대와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생각되지만, 수도꼭지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럼 이어서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며 작업을 해오고 있는 지금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강: 앞서서 잠깐 언급하긴 했는데, 수도꼭지를 빌미로 사물을 보는 제 방식이 확실히 바뀌긴 했어요. 그걸 토대로 다양한 사물들을 가지고 여러 실험들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영상설치 작품들을 하고 있는데, 영상 역시 하나의 사물로 제게 인식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네요. 내용도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제가 비판하던 지배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무언가 차이가 있다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은 성과들로 인해 해외 활동도 하게 되고 미술시장도 경험하면서, 제가 이런 것, 그러니까 시장 등에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과는 멀어지더라도 조금 더 저의 정치적 입장을 들어내면서 형식에서 자유로운 작품 제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이후부터 현재의 작품들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조로 말하는 ‘고난의 행군’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 자신을 유폐시키고 미술과 관련된 일체의 상업적 활동을 중지하고 대학 강사, 막노동, 인테리어 공사 등을 하면서 다시 제가 하고 싶은 작업들을 시작했습니다. 몸은 힘들고 고단해도 마음은 편했던 것 같았습니다. 경제적으론 늘 힘들었던 거구요. 한 10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행히 비엔날레나 미술관 기획전 같은 것에 초대되어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내용적인 연구와 함께 형식적인 실험도 많이 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2008 광주비엔날레 《연례보고》에 출품한 〈신기루 프로젝트〉 설치전경
이: 말씀하신대로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배 이데올로기라 하심은 자본주의를 또는 신자유주의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웃음) 이에 관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저도 많고, 선생님도 많을 텐데, 그것은 자제하도록 하죠. 너무 멀리 갈 것 같아서요. 다시 선생님 작품으로 들어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이 시기 작품 하나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무엇이 좋을까요? 엔위저가 섭외한 작품은 어떨까요? 자료가 잘 남아있지 않아 궁금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거든요. 저도 예전에 선생님 관련해서 글을 쓰면서 광주비엔날레 작품이 무엇이었을지 찾아보다가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었거든요. 비엔날레라는 것이 워낙 큰 행사인지라 작품 하나하나가 자세히 소개되진 않으니까요.
강: 영토나 국경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환상과 그것들이 어떻게 국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으로 악용되는가에 대한 개인적인 아카이브를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국경이라고 한다면 대마도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듣기 싫은 수업을 듣고 있을 때, 종종 창밖에 보이는 대마도를 보며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게 신기루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다와 육지와의 온도 차에 의해서 수증기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빛이 굴절되어서 대마도가 보였던 거라 하더군요. 실제는 아니고요.
그런 사실이 지금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흥미롭게 느껴졌고, 그것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줄기차게 반공교육 받으러 휴전선 갔었습니다. 지금도 분단국가에 살고 있고요. 또 독도도 계속 영유권 분쟁으로 양국이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독일의 전속 갤러리도 베를린의 체크포인트인 찰리라는 곳에 있었는데, 거기도 동서 분단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곳을 둘러보면 관광지가 되어 있거나 공동화가 되어있어요. 국경이나 변경들이 말이죠. 그런데도 한국, 동북아 그리고 전 세계에서는 지금도 영토 분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요.
보통 민족주의적 환상을 이용한 이데올로기들은 자신들의 위기적 정치 상황을 타개하거나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해 악용해 왔습니다.
인간은 원래 반밖에 볼 수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런 신기루 없이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 차원의 접근과 경직적으로 다루어지는 문제들의 온도차를 탐구한 거였습니다. 나이브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지만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는 문제이고 미래로 가기 위해 청산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죠.
아!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자료가 잘 없는 이유가 보통 비엔날레 작품을 생각하시는 분들은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생각하실 텐데, 이때 제 작품은 비주얼적으로는 별 감응이 없는 작품이었거든요. 그렇게 하는 것이 작품의 내용에 충실한 형식이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국내에서는 별 반응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쿠이 웬위저는 저 보고 비주얼이 좋다고 했습니다. (웃음) 외국 언론에도 언급되었고요. 이것도 온도 차 인가요? (웃음)
이: 말씀을 다 들어보니, 형식의 변화에 따른 시대 구분이 수정되어야 할 것 같긴 하네요. 추후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또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시기를 다시 구분해보고 싶네요.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광주비엔날레 작품들도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한 번 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 온도 차라는 것이 어떤 건지 경험도 해볼 겸. (웃음)
그건 그렇고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면, 현대미술의 여러 맥락 중에서 속히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그것도 칼리니스쿠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대륙식 용법인 '정치적인 아방가르드'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동의하시는지요? 만약 동의하신다면, 그런 방향을 지향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지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강: 이런 작품을 하게 된 것은 그들을 공부하면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런 식의 작품을 하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현실이 주는 모순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삶 속에서 축적된 경험과 그 경험에서 비롯된 응축된 분노들이 “세상은 왜 이런 거지?” 등의 물음이 되었고, 그것에 대해 사유하고, 전시를 통해 풀어내면서 이런 작품들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지적하신 정치적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이 비판한 내용들이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유효하게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참고하고 들여다보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의 그 행위들을 교조적으로 똑같이 반복하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것들은 아카데믹 화 되면서 영향력을 잃었고요. 심지어 요즘은 기회주의적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네, 페터 뷔르거식으로 이야기하면 실패한거죠. 하지만 그 영향력은 지대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의 기회들, 움직임들, 정신을 소생시키고 부활시키자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에서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확신이 있으니까요.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대의의 저편에서 소생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더 이상 혁명은 없다는 걸 믿으며 패배주의적 공간에서 소소한 쾌락만을 추구하는 말인(末人)이 되느니 말이죠.
이: ‘혁명’, ‘말인’ 등 오랜만에 듣는 단어네요. 언급하신 ‘혁명’이 ‘촛불혁명’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더 그렇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선생님과의 대화는 이 시대에 안주하며 살고 있는 또는 그 안에서 적응하고 정착해서 살아가려는 저 같은 사람들을 ‘말인’으로 생각하게 하는 효과가 있네요. ‘토리노의 말’보다 못한 (웃음) 반성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던진 질문이지만, 선생님이 이와 같은 활동을 아니 생각을 하게 된 계기를 묻고 싶은데, 그러면 다시 지금 살아가는 현실이 주는 모순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할 것 같고, (웃음) 질문을 돌려 이런 선생님의 생각을 확고하게 만든 레퍼런스는 무엇이 있을지 여쭈면 다른 답이 나올까요? 즐겨 읽는 책도 좋고, 좋아하는 작가도 좋습니다.
강: 언급한 페터 뷔르거의 아방가르드의 이론이란 책? (웃음) 농담이고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학부시절, 대학원 시절에는 포스트모더니즘 관련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제가 이론전공이 아니라서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못했고 독학하다시피 한 처지라 처음에는 두서없이 이것저것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미술관련 외국서적들 사다가 번역해서 보고, 이영철이 외국논문들을 엮어서 출판한 책들과 박이소 등이 번역한 책들을 보면서 거기에 언급되는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의 저서를 두루 읽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 책을 많이 읽었고요. 초기에는 들뢰즈나 푸코, 데리다, 자크 라캉, 보드리야르, 좀 다르지만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같은 사람들은 중점적으로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정도 제 스스로 체계화가 되고 난 이후에는 삶 속에서 포스트모던 이론들이 전복적인 힘들을 잃고 있고, 역으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부합하게 되는 한계를 느끼면서 그 반대 입장에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나 알랭 바디우 같은 사람들 쪽 텍스트들을 많이 읽은 것 같습니다. 미디어 이론 서적이나 미학과 철학책들 그리고 리뷰들은 늘 가까이 두고 다양하게 봤습니다.
그러다가 그들 사유의 뿌리를 찾아 독일 관념론이나 맑스나 레닌이 쓴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었습니다. 요즘은 옛날 책들을 많이 보는 편입니다. 제가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오독이었어도 제 안에서 창조적으로 재생산되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누가 읽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먼저 공부하고 다른 정치적 입장으로 돌아선 분들이 말릴 때도 반대로 제 나름 대로 현실을 견지하고 정세를 판단하면서 제 생각과 공통적인 부분을 먼저 사유하고 이론화한 사람들을 찾아서 온 것 같습니다. 대개 글을 읽을 때 비판적으로 읽지 않나요? 받아들일 것은 받아드리고 버릴 건 버리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이 지점까지 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읽은 것들이 참고가 되긴 하지만, 바로 작품의 레퍼런스가 된다든지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저를 보고 서구의 미술이나 이론을 추종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던데, 교조주의적으로 그들을 따르진 않습니다. 그냥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우리가 대면한 문제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정도일 뿐인 거죠. 더 나아가 설령 교조주의적으로 보일지언정 그것이 이론가나 철학자들 개인의 독창적인 생각입니까? 인류가 만든 공동의 사유에서 발생한 거죠. 에티엔 발리바르가 말했듯이 그런 것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딱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지는 않습니다. 다른 작가들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주요 전시 정보 등은 가끔 인터넷이나 잡지 등을 통해서 들여다보고는 있습니다.
이: 많은 책들을 읽으셨네요. 작가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새삼 놀랍게 다가오네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소위 이론한다는 사람들의 건방진 생각이겠죠? (웃음) 그런데도 읽어내신 책들이 소설 등이 아니라 철학 또는 사회과학 서적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책을 선택하는 방식이 이론가들과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선생님 작품에 대한 주변의 평들 중 '난해하다'는 의견과 그렇기에 ‘현학적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강: 그런가요? (웃음) “난해하다”라. 작품이 어렵다는 것은 제가 지향하는 바라서 나쁘진 않네요.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쉽고 이해하기 좋은 시각적 생산물들이 넘쳐납니다. 또 매혹적인 상품들과 아름다운(?) 예술품들도 많이 있고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알기 쉽다는 보편적 기준은 무엇이고, 그것에 맞추어 소비된다는 것이 과연 생산적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목적 없이 수단만 있다고 되느냐는 거예요. 누군가 지금은 소통이 안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소통이 너무 많아 서 문제라는 말을 했는데, 이에 동의합니다. 또 쉬운 것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문제도 있죠. 바보로 만들어요. 아도르노가 이야기한 것들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그가 대중예술을 비판하며 언급한 것들에는 부분 동의합니다. 그래서 전 지금 시대의 예술은 어려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그 역사 속에서 항상 그 시대에 대항해 왔으니까요. 오히려 제가 우둔해서 더 어려운 이야기들을 작품에 더 깊이 있게 다루지 못 하는 것이 개인적인 불만입니다. 저의 평범함이 원통해요.
저는 사회의 현상들에 대한 관찰을 염두에 두면서도 이를 총체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시도, 그리고 조형적인 부분에서도 여러 실험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과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동 떨어졌다는 얘기는 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작은 서사를 얘기하지 않는다 뿐인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은 리버럴하게 잘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나요? 저는 그런 정치적 입장에 있질 않아서 저한테는 그런 기대와 강요 안 하시는 게 서로의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합니다. (웃음) 그분들이 그렇게 비판하시는 전체주의처럼, 모든 작가들이 다 같이 그런 주제로 작업을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뭐 대단한 이념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죠.
현학적이라고 해서 완전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학적이라고 해서 나쁜 작품인 것은 아니잖아요. 복잡한 세상의 모순을 들추어내고 분석하려면 학문적 연구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추상적이고 피상적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죠. 현실과 동떨어져서요.
그런데 현실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던가요?
이: 지금까지 주고받은 이야기들에서 충분히 언급되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정리해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강: 예술은 시대에 따라 그 정의들을 달리해왔지만, 그 시대의 어둠에 시선을 고정하면서 현재의 공간을 타파하고, 내일로 가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미래에 시선을 두고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위한 토대를 만들어 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새로운 보편적 진리를 찾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나 사회가 만든 악의적인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저항하며 아직 환영할 준비가 되지 않은 미래의 공간을 열기 위해 끊임없이 동시대를 재사유하고 연구하고 실험하는 작가들이 필요하고요.
개인적으로 저는 스스로 모더니스트라 생각하기에 제가 마지막에 어느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물론 크라잉 게임이기는 합니다만.
부산현대미술관 개관전 《미래를 걷는 사람들》(2018)에 출품한 〈인민들의 발할라 입성〉 설치전경
이: 마지막으로 아직 중견이라 불리기에는 젊지만, 교수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작가로서 후배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간단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산 외의 지역에서 활동하는 법이어도 좋고, 그곳에서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선배로서의 충고도 좋습니다. 그리고 심도 깊게 들어가서 어떤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등도 좋습니다.
강: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물리적인 장소의 한계는 많이 극복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느 특정한 장소나 도시를 베이스로 하는 게 뭔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고요. 물론 그런 거 믿으시는 분들은 여전히 많지만요. 그곳을(사이버 인터페이스를 포함해서) 누가, 무엇이 장악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에너지 낭비라 생각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겠지요.
결국 미술이란 자신의 아이디어를 시각적, 공감각적으로 들어내는 것입니다. 현실을 견지하면서 깊이 있는 사유와 시대를 통찰해야 하고 비판적인 날이 서 있어야 합니다. 또 동시에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해야 하고요. 작가가 책을 왜 보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숙고하기 위해서 책과 이론은 필요하죠. 인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후배들에게 제가 뭘 이야기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예술가라는 것이, 고전적인 패러다임이긴 하지만, 제 가치관을 따르자면 정신적 물질적 고통 속에 사는 업이라 추천하고 싶지도 않고 되도록 말리고 싶습니다. 자기 본능과 욕망에 반하면서 예술을 믿고 추구하는 작가가 점차 없어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말씀드리자면 새로운 예술은 작가가 속해있는 시간과 공간(상징적인 차원을 포함해서)으로부터 이격될 때 생겨난다고 합니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악의적인 가치에 휘둘리지 마시고 자유스럽지 않지만 마치 자유스러운 것처럼 자신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를 돌파하려면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이버 공간을 포함해서 어느 곳을 누가, 무엇이 장악하고 있느냐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라는 말이 특히 많이 와 닿습니다. 저도 대학 다닐 때, 교수나 성공한 작가들, 그러니까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등을 열심히 들여다보던 것이 생각나네요. 대부분 아니 거의 다 별로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은데,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들한테 굽신굽신 비위를 맞춰가며 그들처럼 되고자 노력도 했었습니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면서 정작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그것인데요. 이게 변명이라면 변명인데,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 보면, 그곳의 선생들이 최고인양 느끼곤 하잖아요. 그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니까요. 왜 그때 그분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사고하지 못했을까, 아니 별로인 것을 어렴풋이 느꼈음에도 왜 그것을 부정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긴 합니다. 다행히도 저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금 바뀌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국의 왜곡된 근현대미술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재편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선생님부터 부끄러우시겠지만 제 앞에 계신 강 선생님까지. (웃음)
마지막으로 작가를 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물질적인 고통이 앞에 있으니 되도록이면 말리고 싶다는 말도 공감이 됩니다. 고전적인 패러다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게 고전적인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이게 선생님이 언급한 ‘이격’이라는 단어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기존의 가치관에 혼란을 주고 흔드는 것이 좋은 예술이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그것은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 테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물질적인 고통이 동반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주위의 많은 좋은 작가들이 그런 환경에 있기도 하고요. 물질적인 고통. 현실인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말리진 않습니다. 무책임한 말이 될 수도 있는데, 지금 환경은 분명 이전보다는 나아졌고 앞으로 더 나아질 테니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문화재단도 생기고 했으니까. 젊은 친구들이 자신을 조금 더 믿고 앞으로 꿋꿋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말하다 보니, 제가 포스트모던이 지향하는 다원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예술이란 무엇이다 답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부정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으니까요. 불편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어느 부분 부정하는 것은 맞습니다. 다원성이라는 이름하에 너무 저질의 예술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다원성이라는 개념이 주는 어떤 애매모호함이 시대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뭐랄까, 분명한 적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고 할까요? 설명하자면 긴데, 아무튼 그렇습니다. (웃음)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습니다. 바쁘실 텐데요.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또 정리되지 않은 거친 질문들에 성실히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 아닙니다. 오랜만에 이전 작품 이야기도 하고, 나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다원성 관련한 이야기, 저도 공감하는 내용이어서 뭐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걱정 마세요. 다원 우주도 넘어서야 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니까요. (웃음) 랑시에르가 말한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적대가 보다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나름 정리해서 말한다고 했지만, 생각해보니 두서없이 말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죠.
2019년 5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