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어두운 밤의 잔여
공간 힘
2016. 9. 6 - 9. 30
강태훈
Remainder in the Deeply dark night
Space Heem
Sep. 6. 2016 - Sep. 30
Tae Hu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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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음 - 박수지
(불)가능한 혁명의 끊임없는 순환
사물의 수집과 배열, 브리콜라주
우리 주변의 숱한 사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 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 연구할 때 중요한 연구자료로 사용되곤 한다. 잘 알다시피 박물관은 이러한 사물들을 수집하여 연구·발표하는 기관인데, 박물관에 근무하는 학예사들의 연구를 통해 아무 말도 없는 한낱 사물들은 그 쓰임이 밝혀지는 것은 물론, 당시 문화가 어디에서 영향을 받고 어디에 주었는지 문화 교류의 흔적을 찾아내는 사료가 되고, 또 그것들을 통해 당시 추구했던 정신적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까지 밝혀내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강태훈의 전시서문 앞에 이와 같이 ‘사물’과 ‘박물관’, ‘학예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강태훈이 이제까지 작업을 해오는 방식이 박물관의 학예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강태훈은 우리 주위의 다양한 사물들을 수집한 후 그것들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탁월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최초 폐품 수집소, 즉 고물상에서 버려진 사물들을 수집한 후 그것들을 집적하여 마치 모더니즘 조각처럼 보이게 한 〈잠재적 공간〉(2002)부터 다양한 사물들을 체스 판 위에 올려놓아 새로운 맥락에서 읽히도록 구성한 설치작품 〈The Rule#2〉(2003), 일상 속에서 쉽게 잃어버리는 사물들을 ‘마의 삼각지대’를 의미하는 삼각형 안에 재배치한 〈일상 공간의 삼각형〉(2003), 2015년 여섯 번째 개인전 《모호한 중력》에서 선보인 일련의 작품들까지 그가 사물들을 가지고 작업해온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예사와 비슷한 활동을 한다고 해도 아주 같은 것은 아니다. 강태훈과 학예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학예연구사는 여러 근거들을 마련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사물들을 배치하면서 (설사 새로운 맥락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목적을 둔 데 반해, 강태훈은 작가 본인의 작의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근거해 사물을 배치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어둠과 어둠 사이, 끊임없는 순환고리
이런 강태훈이 이번 전시, 《깊고 어두운 밤의 잔여》에서는 기존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전시장에는 그가 이제껏 활용해온 사물이라곤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영상들만이 상영된다. 물론 작가가 작품에 활용하는 것이 기성 사물들에서 영상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것만을 두고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는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은 보여지는 형식, 더 나아가 내용까지도 변화를 꾀하고 있다. 작가가 영상을 선보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불과 몇 달 전 용산에 위치한 아마도 예술공간의 기획전 《Antagonistic Monument; 적대의 기념비》에 인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첫 영상작품인 〈잔여의 공간〉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가 설사 영상을 다룬다고 할지언정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보기 어려웠는데, 이유는 전시를 기획한 신양희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잔여의 공간〉은 시위와 투쟁의 현장을 담은 영상과 사진을 변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영상과 사진을 매체로 다루고만 있을 뿐 기존에 그가 사물들을 가지고 해왔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디지털매체의 등장 등으로 달라진 사물의 지평을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영상’ 또한 ‘하나의 사물’로 간주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개인전에 그가 선보이는 작품들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다. 무언가를 수집하여 배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번에는 직접 영상을 촬영·제작하였고, 그것을 플롯을 구성하여 설치하고 상영하는 것까지 계산하여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은 전시 제목인 《깊고 어두운 밤의 잔여》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스산한 어둠이 전체를 지배한다. 영상을 상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시장이 어두워야 했겠지만, 꼭 그것만을 위해 어둡게 연출된 것이 아니다. 작가는 밤을 아니 칠흑 같은 어둠을 재현하기 위해 전시장 전체 톤을 낮췄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백사장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선에 시체를 연상시키는 머리카락 더미가 무기력하게 파도에 밀려와 출렁이는 모습을 촬영한 9분 48초의 단채널 영상 〈안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이다. 이 영상 옆에는 영상에 사용된 사물인 머리카락 더미가 수족관 안에 비치되어 있어 알 수 없는 현장감을 더욱 자아내는데, 이 전시가 앞으로 무언가의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 끝에 남는 것, 즉 ‘죽음의 잔여물’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라 점을 서술한다.
〈안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에 이어 설치된 작품은 해가 지기 바로 직전 숲 속에서 촬영된 단채널 영상 〈어둠과 어둠 사이〉이다. 이 작품은 아직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풀타임 1인칭 시점으로 촬영 제작되었는데 이 기법은 관람자로 하여금 영상 밖에서 작품 속의 사건이나 상황을 관찰하게 하여 영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대개의 영상들과는 달리, 영상 안으로 관람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영상이 묘사하는 사건이나 상황을 직접 경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자는 영상을 촬영한 이의 시점을 고스란히 공유하면서 동시에 연출자가 의도하는 감정 또한 그대로 느끼게 한다. 영상의 내용은 딱히 플롯이랄 게 없다. 6분 50초라는 러닝타임이 있지만 단지 러닝타임일 뿐 영상 어디에서 감상을 시작해도 사실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영상이라기 보다 움직이는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 작품이 재현하는 것은 우선 금방이라도 해가 져 어둠이 닥칠 것 같은 하늘을 강박적으로 쳐다보며 불안과 공포에 떠는 두려움 가득한 이의 시선이다. 그렇기에 화자의 시선이기도 한 영상 화면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느 한 곳을 바라보기보다 불안한 듯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고 중간중간에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듯한 긴박함이 연출되기도 해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어둠과 어둠 사이〉 옆 영상설치작품인 〈야간 수영〉도 촬영한 위치가 숲 속에서 물 속으로 옮겨졌을 뿐 같은 형식으로 관람자를 영상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풀타임 1인칭 시점의 작품이어서 영상을 바라보면 영상을 촬영한 사람의 시선에 묶이게 되는 영상이다. 그리고 〈어둠과 어둠 사이〉와 똑같이 러닝타임은 존재하되 그것의 의미가 중요치 않아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이미지 또는 움직이는 설치물이라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내용 또한 〈어둠과 어둠 사이〉와 소재만 다를 뿐 다르지 않다. 영상은 수면 위아래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시선을 재현하고 있다. 이 영상도 앞선 영상처럼 무언가 알 수 없는 긴박감을 느끼게 하는데, 감상하는 관람자는 이러한 연출 때문에 이내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을 선사 받는다. 〈야간 수영〉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상 역시 어둠이 도래하기 직전에 바닷가 한 가운데에서 촬영된 것이지만, 여기서는 어둠을 단순히 해가 져 빛이 사라지는 어둠이라기보다 죽음이라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 두 영상의 차이점이 있다면 〈야간 수영〉은 앞서 설명한 〈어둠과 어둠 사이〉보다 더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관람자가 감상할 위치를 영상으로 둘러쌌다는 점이다. 이 두 작품은 각기 다른 장소, 즉 숲 속과 물 속에서 촬영되었고, 상영되는 형식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 곧, 어둠 그리고 죽음이 곧 닥친다는 느낌을 관람자로 하여금 자아내어 두려움을 넘어 공포까지 심어준다는 의미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기존의 사용하던 조형언어를 버리고 전혀 새로운 자세로 작품제작에 임하고 있다. 작품의 주제 또한 노골적으로 어떤 이슈나 사건을 다루던 이전과는 달리 ‘어둠’과, 더 나아가 ‘죽음’을 다루고 있다.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 자체도 기존과는 다르게 임할 것을 제안한다. 기존의 작품들이 사물의 기표와 기의의 분리로 관람자로 하여금 다양한 추측들을 이끌어내어 지적인 유희를 즐기게 하는 감상을 제안하고 있다면, 이번 일곱 번째 개인전 《깊고 어두운 밤의 잔여》에서는 두려움과 공포 등 어떤 감정을 관람자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끌어내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전시구성도 작가의 말을 빌려 “교과서적인” 명확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안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고, 이후 〈어둠과 어둠 사이〉를 통해 제3자가 화자, 즉 주인공이 되어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어둠뿐인 그래서 불안과 공포에 떨 수 밖에 없음을 느끼게 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간 수영〉에서 화자가 불안과 공포 속에서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고자 혹은 그것들에 전면으로 마주하고자 어둠 속에서 수영이라는 희망 없는 터무니 없는 행위를 하는 과정을 전시 전반을 통해 그리고 있다. 그리고 전시 중간의 몇몇의 장치들, 예를 들어 처음 관찰자의 시점에서 시작한 영상이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화자의 시점으로의 전환되는 것과 〈야간 수영〉에서 얼핏 얼핏 보이는 ‘머리카락 더미’들 등에 의해 관람자는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가 〈안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에서 묘사된 죽음이 나의 죽음에 다름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묘한 감정 속에 또다시 전시플롯에 따라 불안과 공포를 다시금 경험하게 하는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강태훈은 이번 전시 《깊고 어두운 밤의 잔여》를 통해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고자 했던 이전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조형언어를 선택하여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리고 이전의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언급하고 노골적으로 사회 시스템에 문제를 비판하는 것에서 벗어나 ‘어둠’과 ‘죽음’이란 다소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전혀 다른 차원의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강태훈이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가치 자체가 변했다던가 작품과 전시를 통해 작가로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바뀐 것은 아니다.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전시의 플롯 때문에 정신없이 전시를 순회하다가 어느 순간 그 순환구조에서 벗어나 전시의 한 구석을 바라보면 이전 다른 전시에서 한 번 선보인 바 있는 〈잔여의 공간〉이 다시 상영되어 전시 분위기 전체를 전환한다. 그리고 이로써 전시가 스산하게 전달하고 있는 어둠과 죽음이 형이상학적인 주제가 아니고 우리 현실에 대한 이야기였음이 환기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수집, 알레고리적 해석, 재배치라는 강태훈이 그간 해온 작품제작 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 작품은 작가가 수집해온 이 땅 위에서 일어난 수많은 운동들과 혁명의 이미지들이 작가만의 독특한 해석과 배열을 통해 여러 파편들에 중첩되어 상영되는 영상설치작품이다. 그간 해왔던 작업의 연장선상이어서 그런지 각기 다른 시기의 운동들이고 혁명들의 이미지들을 배열하는 방식이 실로 탁월하고 효과도 뛰어나다. 당시 전시를 기획한 신양희의 지적처럼 “천장에 매달린 여러 유리-스크린은 역사적 사건의 차이를 담아내면서도, 그럼에도 그것들을 보유한 인민의 경험을 하나의 통일체로 엮어낸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동시에 끊임없는 실패가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잔여의 공간〉은 각기 다른 시기의 운동과 혁명들을 중첩되는 공간 속에 배치함으로써 각각의 이미지들이 공통의 공간을 공유하게 하고 그로 인해 혁명이 존재했고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해줌과 동시에 그것이 끊임없이 실패로 돌아가 잔여로 밖에 존재할 수 없음이 상기되어 양가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이제 다시금 전시장의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전시 전반을 지배했던 깊은 어둠 그리고 죽음은 유토피아를 향한 여러 노력들이 있고, 그 뒤에는 어김없이 좌절이 찾아옴을 전시장 전체에 그리고 있음이 노골적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금 시작하고 이내 또 실패하고 좌절함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즉 좌절과 절망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 순환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전시장 전체에 그려졌음이 상기된다. 항상 실패로 끝나기 때문에 실낱 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아 어찌 보면 극도로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복 속에 진보의 논리, 그리고 작가가 언젠가 필자에게 언급한 얘기를 가져다 쓰면 세상은 “그래도 나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실패가, 그리고 죽음이 우리 앞에 있다 해도 우리는 계속해서 반복하여 유토피아를 꿈꾸고 나아가기를, 반복해서 실패하여 나아가기를 이 전시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보성(미술이론, 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Infinite circulation of (im)possible revolution
A collections and orders of objects, Bricolage
Some ordinary objects around us have even more informations than we think, they often be used as essential materials of experiments to research our past.
As known, the museums are the organisation that collect, research and present, by the curators, ordinary speechless objects be discovered their extra ordinary uses, become historical materials to trace the affections of cultures and also, their spiritual values pursued in each periods. As mentioning of the 'object,' museum,’ and ‘curator,’ saying that the methods of creating art of the artist, Taehun Kang is not further away from how museum curators works. The artist Taehun Kang is well known as his works deliver messages of rephrased meanings of collected objects.
From the objects collected from the first junk yard, rearranged and re-fabricated into sculptures like some modernism pieces 〈Potential space〉(2002), the uniquely placed objet installation work on a chessboard 〈The Rule#2〉(2003), the relocated some ordinary objects those are easy to loose in our daily lives inside a triangle shape which is a metaphoric symbol of the ‘Bermuda triangle’ 〈일상 공간의 삼각형〉(2003), to the sixth solo exhibition 《Obscure gravity》, they are the representatives of the artist’s works that used objet.
But because his experiments contain similar process of curators, it can't be the same. There is a decisive aspect to say the difference between the artist and curators that they intensify the fundamental orders and within the original forms, they realign in scientific methods (even to suggest some new contexts, but the artist Kang rearrange objects by manipulating originalities by creative and allegoric reading of the way of the artist-self.
Between the dark and the dark, an infinite circulation
The artist, Taehun Kang seems to picked a big different appearance in the exhibition,《Remainder in the deeply dark night》. There are only film works installed in the exhibition without any objet works like the artist has been used in the past exhibitions. Of course it is not enough to judged to be different by only the materials, objects to films, have been used in the exhibitions. The methods of the artist shows in this solo exhibition are transforming the appearance and also, the context. It is not the first time that the artist chose films. A couple of month ago, in the curated group exhibition at a non-profit space Amado called 《Antagonistic Monument》, the artist presented a film work, 〈Space of the remainder〉. But until then, it was impetuous to say that the artist experimented a new method, and it seemed more appropriate to say it was simply one of many objets used along with many other objects those represented and captured the moments of strike or protest, not much further from the past works.
The artist recognised the rephrased definitions of objects after the appearance of the digital media so ‘film’ is initiated as only ‘an object’. But this exhibition is different for sure. Instead of editing sone collected films or images, the artist filmed and produced self, constructed and installed.
The exhibition space holds dark and chilled atmosphere as can be imagined from the title 《Remainder in the deeply dark night》 itself. It is assumed that is used to present the film through projectors but that is not the whole reason for dark space. The artist toned down the whole space to represent the night, the deep dark night. The first sight to face when enter the exhibition space is a 9:45 long single channel film work 〈About things can’t be enshrined〉 shows floating hair in between the lines of sand and water on a beach as it reminds of a dead body. Next to that, there is the hair used in the film located inside of a water tank, pre-suggest the viewers will be stepping into an exhibition presenting some death and the ‘remainders of death’.
Another installed film work contains images of greens just before the sunset called 〈In the middle of the dark and dark>. It was filmed with the first person point of view that drives the viewers to experience the film as if they are actually experiencing the happening of the movie, unlike others those give some spaces to viewers for watch the scenes in the movies. This method of filming guides the viewers to feel emotions, the artist intends, and share to point of view directly. There is no float in this film. The running time of the film is 6’50” but it doesn’t make a big difference to watch film starting at any point. So it is batter to be called as moving images rather than calling it film. The work represents one’s point of view in fears and anxiety staring at darkening sky. So the images are not settled to watch one point. It watches around, quickly turns from here to there.
〈Night swimming〉 is another film installation work also, uses the first person point of view that drives the viewers into the images same as 〈In the middle of the dark and dark〉, but only the location has been moved to the water from the green. And it is also, batter to call it a moving image rather than a film. They include the contents with different subject matters. The film shows the precarious movements in and out of the surface of water. These movements create undiscovered tension, make the viewers get fake feelings of suffocation. As we can imagine already from the title 〈Night swimming〉, this film was made just before the darkest dark covers the sky, but the darkness of this film is read closer to a death more than just a darkness created by the sunset. To mention the difference of these two film works, is the installation of the space the viewers run into watch the film that the 〈Night swimming〉 is surrounded by a closed surfaces to exaggerate the fear. Both two works are not much different as they both create fears and anxieties of facing death close to the viewers with each forms of presenting.
As it notifies us from all the characteristics of the works, the artist left the sculptural languages of past, chose new attitudes toward the works, not only uses different methods and objects, but also in the subject which dealing of ‘darkness’ and ‘death’. It is suggested to the viewers of different approach toward the exhibition. Recent works of the artist gives intellectual joy by leading us to diverse conclusions of our own by manipulating the meaning of objects, but this 7th solo exhibition, 《Remainder in the deeply dark night》 pull out direct emotions of fears and panics from us. The constructions of the exhibition hold a clear float as the artist self put it “typical”. 〈About things can’t be enshrined〉 lets us to watch someone’s death as the third, through 〈In the middle of the dark and dark〉 the viewers, the third becomes to experience the scene as the first person, and lastly in 〈Night swimming〉, the main character tries swim away to escape free or face directly of the anxieties which is a ridiculous action in the situation, and this characteristic showed over the exhibition. And some tools placed in the exhibition, for example, at first it started as the point of viewer changes to the point of the first person point of view in 〈In the middle of the dark and dark〉, in 〈Night swimming〉 by the piles of hair, the viewers redelivered to the first and realise the death depicted in 〈About things can’t be enshrined〉 was not others but it was mine, and the ambiguous emotion caused of this redirect the viewers in the circulation of the exhibition floats.
The artist Taehun Kang tries many changes by using different sculptural language s through the exhibition 《Remainder in the deeply dark night》, unlike the exhibitions of past. And deviate from dealing each specific issues of the systems of society in reality, chose rather metaphysical issue of ‘darkness’ and ‘death,' suggested a whole new dimensional message to us. But it is hard to say that the pursuance of the artist’s approach toward artistic message has been changed.
The possibility and impossibility of a revolution
The exhibition leads to the work 〈Space of the remainder〉 that has been shown once in the recent exhibition in the corner which sort of breaks away from the circulation after dragged by the circulation of the float, and it refreshes the atmosphere of whole. And by that, the atmosphere of metaphoric darkness and death becomes our reality. As it is mentioned earlier, these film works are still including the methods of the artist has been used such as collecting, allegoric analysis, rearranging, and many movements and revolutions that Kang has been collected from the world expressed as unique analysation through film installation. These movements are each from different periods and the rearrangements of images are truly effective. As the curator of the exhibition said "Those class screens hanging from the ceiling contains the differences of each historical periods, yet still connect them as one unification of the experience of the citizen." So this work stimulates the viewers of utopian imaginations, and enlightens the existence of failure.
In other words, the exhibition, 〈Space of the remainder〉 revisits the emotions of being the failure and staying as remainder by the repetitions of trying and failing process of each different periods’ movements that are supposed to be possible to achieve and exist the revolution.
Now, let us remind those works in the exhibition. The darkness and the death ruled over the space brings hard the efforts toward the utopia, and behind it, followed by the certain failure. And it shows the fact shows in the exhibition space, to overcome those, the process repeats over and over, nonetheless of the repetitions of frustration and despair, it keeps happening again. It always happens to be fail, so there is no tiny bit of hope, make it extremely desperate. But in this repetition, the pursuance if the artist Taehun Kang has liberal logic, and the artist once said " but still the world progresses ." So the failure, and the death awaits us in front but we need to keep try and repeat the failure.
사물의 수집과 배열, 브리콜라주
우리 주변의 숱한 사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 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 연구할 때 중요한 연구자료로 사용되곤 한다. 잘 알다시피 박물관은 이러한 사물들을 수집하여 연구·발표하는 기관인데, 박물관에 근무하는 학예사들의 연구를 통해 아무 말도 없는 한낱 사물들은 그 쓰임이 밝혀지는 것은 물론, 당시 문화가 어디에서 영향을 받고 어디에 주었는지 문화 교류의 흔적을 찾아내는 사료가 되고, 또 그것들을 통해 당시 추구했던 정신적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까지 밝혀내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강태훈의 전시서문 앞에 이와 같이 ‘사물’과 ‘박물관’, ‘학예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강태훈이 이제까지 작업을 해오는 방식이 박물관의 학예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강태훈은 우리 주위의 다양한 사물들을 수집한 후 그것들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탁월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최초 폐품 수집소, 즉 고물상에서 버려진 사물들을 수집한 후 그것들을 집적하여 마치 모더니즘 조각처럼 보이게 한 〈잠재적 공간〉(2002)부터 다양한 사물들을 체스 판 위에 올려놓아 새로운 맥락에서 읽히도록 구성한 설치작품 〈The Rule#2〉(2003), 일상 속에서 쉽게 잃어버리는 사물들을 ‘마의 삼각지대’를 의미하는 삼각형 안에 재배치한 〈일상 공간의 삼각형〉(2003), 2015년 여섯 번째 개인전 《모호한 중력》에서 선보인 일련의 작품들까지 그가 사물들을 가지고 작업해온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예사와 비슷한 활동을 한다고 해도 아주 같은 것은 아니다. 강태훈과 학예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학예연구사는 여러 근거들을 마련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사물들을 배치하면서 (설사 새로운 맥락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목적을 둔 데 반해, 강태훈은 작가 본인의 작의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근거해 사물을 배치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어둠과 어둠 사이, 끊임없는 순환고리
이런 강태훈이 이번 전시, 《깊고 어두운 밤의 잔여》에서는 기존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전시장에는 그가 이제껏 활용해온 사물이라곤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영상들만이 상영된다. 물론 작가가 작품에 활용하는 것이 기성 사물들에서 영상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것만을 두고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는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은 보여지는 형식, 더 나아가 내용까지도 변화를 꾀하고 있다. 작가가 영상을 선보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불과 몇 달 전 용산에 위치한 아마도 예술공간의 기획전 《Antagonistic Monument; 적대의 기념비》에 인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첫 영상작품인 〈잔여의 공간〉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가 설사 영상을 다룬다고 할지언정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보기 어려웠는데, 이유는 전시를 기획한 신양희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잔여의 공간〉은 시위와 투쟁의 현장을 담은 영상과 사진을 변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영상과 사진을 매체로 다루고만 있을 뿐 기존에 그가 사물들을 가지고 해왔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디지털매체의 등장 등으로 달라진 사물의 지평을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영상’ 또한 ‘하나의 사물’로 간주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개인전에 그가 선보이는 작품들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다. 무언가를 수집하여 배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번에는 직접 영상을 촬영·제작하였고, 그것을 플롯을 구성하여 설치하고 상영하는 것까지 계산하여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은 전시 제목인 《깊고 어두운 밤의 잔여》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스산한 어둠이 전체를 지배한다. 영상을 상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시장이 어두워야 했겠지만, 꼭 그것만을 위해 어둡게 연출된 것이 아니다. 작가는 밤을 아니 칠흑 같은 어둠을 재현하기 위해 전시장 전체 톤을 낮췄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백사장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선에 시체를 연상시키는 머리카락 더미가 무기력하게 파도에 밀려와 출렁이는 모습을 촬영한 9분 48초의 단채널 영상 〈안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이다. 이 영상 옆에는 영상에 사용된 사물인 머리카락 더미가 수족관 안에 비치되어 있어 알 수 없는 현장감을 더욱 자아내는데, 이 전시가 앞으로 무언가의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 끝에 남는 것, 즉 ‘죽음의 잔여물’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라 점을 서술한다.
〈안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에 이어 설치된 작품은 해가 지기 바로 직전 숲 속에서 촬영된 단채널 영상 〈어둠과 어둠 사이〉이다. 이 작품은 아직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풀타임 1인칭 시점으로 촬영 제작되었는데 이 기법은 관람자로 하여금 영상 밖에서 작품 속의 사건이나 상황을 관찰하게 하여 영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대개의 영상들과는 달리, 영상 안으로 관람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영상이 묘사하는 사건이나 상황을 직접 경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자는 영상을 촬영한 이의 시점을 고스란히 공유하면서 동시에 연출자가 의도하는 감정 또한 그대로 느끼게 한다. 영상의 내용은 딱히 플롯이랄 게 없다. 6분 50초라는 러닝타임이 있지만 단지 러닝타임일 뿐 영상 어디에서 감상을 시작해도 사실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영상이라기 보다 움직이는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 작품이 재현하는 것은 우선 금방이라도 해가 져 어둠이 닥칠 것 같은 하늘을 강박적으로 쳐다보며 불안과 공포에 떠는 두려움 가득한 이의 시선이다. 그렇기에 화자의 시선이기도 한 영상 화면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느 한 곳을 바라보기보다 불안한 듯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고 중간중간에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듯한 긴박함이 연출되기도 해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어둠과 어둠 사이〉 옆 영상설치작품인 〈야간 수영〉도 촬영한 위치가 숲 속에서 물 속으로 옮겨졌을 뿐 같은 형식으로 관람자를 영상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풀타임 1인칭 시점의 작품이어서 영상을 바라보면 영상을 촬영한 사람의 시선에 묶이게 되는 영상이다. 그리고 〈어둠과 어둠 사이〉와 똑같이 러닝타임은 존재하되 그것의 의미가 중요치 않아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이미지 또는 움직이는 설치물이라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내용 또한 〈어둠과 어둠 사이〉와 소재만 다를 뿐 다르지 않다. 영상은 수면 위아래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시선을 재현하고 있다. 이 영상도 앞선 영상처럼 무언가 알 수 없는 긴박감을 느끼게 하는데, 감상하는 관람자는 이러한 연출 때문에 이내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을 선사 받는다. 〈야간 수영〉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상 역시 어둠이 도래하기 직전에 바닷가 한 가운데에서 촬영된 것이지만, 여기서는 어둠을 단순히 해가 져 빛이 사라지는 어둠이라기보다 죽음이라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 두 영상의 차이점이 있다면 〈야간 수영〉은 앞서 설명한 〈어둠과 어둠 사이〉보다 더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관람자가 감상할 위치를 영상으로 둘러쌌다는 점이다. 이 두 작품은 각기 다른 장소, 즉 숲 속과 물 속에서 촬영되었고, 상영되는 형식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 곧, 어둠 그리고 죽음이 곧 닥친다는 느낌을 관람자로 하여금 자아내어 두려움을 넘어 공포까지 심어준다는 의미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기존의 사용하던 조형언어를 버리고 전혀 새로운 자세로 작품제작에 임하고 있다. 작품의 주제 또한 노골적으로 어떤 이슈나 사건을 다루던 이전과는 달리 ‘어둠’과, 더 나아가 ‘죽음’을 다루고 있다.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 자체도 기존과는 다르게 임할 것을 제안한다. 기존의 작품들이 사물의 기표와 기의의 분리로 관람자로 하여금 다양한 추측들을 이끌어내어 지적인 유희를 즐기게 하는 감상을 제안하고 있다면, 이번 일곱 번째 개인전 《깊고 어두운 밤의 잔여》에서는 두려움과 공포 등 어떤 감정을 관람자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끌어내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전시구성도 작가의 말을 빌려 “교과서적인” 명확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안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고, 이후 〈어둠과 어둠 사이〉를 통해 제3자가 화자, 즉 주인공이 되어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어둠뿐인 그래서 불안과 공포에 떨 수 밖에 없음을 느끼게 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간 수영〉에서 화자가 불안과 공포 속에서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고자 혹은 그것들에 전면으로 마주하고자 어둠 속에서 수영이라는 희망 없는 터무니 없는 행위를 하는 과정을 전시 전반을 통해 그리고 있다. 그리고 전시 중간의 몇몇의 장치들, 예를 들어 처음 관찰자의 시점에서 시작한 영상이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화자의 시점으로의 전환되는 것과 〈야간 수영〉에서 얼핏 얼핏 보이는 ‘머리카락 더미’들 등에 의해 관람자는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가 〈안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에서 묘사된 죽음이 나의 죽음에 다름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묘한 감정 속에 또다시 전시플롯에 따라 불안과 공포를 다시금 경험하게 하는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강태훈은 이번 전시 《깊고 어두운 밤의 잔여》를 통해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고자 했던 이전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조형언어를 선택하여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리고 이전의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언급하고 노골적으로 사회 시스템에 문제를 비판하는 것에서 벗어나 ‘어둠’과 ‘죽음’이란 다소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전혀 다른 차원의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강태훈이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가치 자체가 변했다던가 작품과 전시를 통해 작가로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바뀐 것은 아니다.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전시의 플롯 때문에 정신없이 전시를 순회하다가 어느 순간 그 순환구조에서 벗어나 전시의 한 구석을 바라보면 이전 다른 전시에서 한 번 선보인 바 있는 〈잔여의 공간〉이 다시 상영되어 전시 분위기 전체를 전환한다. 그리고 이로써 전시가 스산하게 전달하고 있는 어둠과 죽음이 형이상학적인 주제가 아니고 우리 현실에 대한 이야기였음이 환기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수집, 알레고리적 해석, 재배치라는 강태훈이 그간 해온 작품제작 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 작품은 작가가 수집해온 이 땅 위에서 일어난 수많은 운동들과 혁명의 이미지들이 작가만의 독특한 해석과 배열을 통해 여러 파편들에 중첩되어 상영되는 영상설치작품이다. 그간 해왔던 작업의 연장선상이어서 그런지 각기 다른 시기의 운동들이고 혁명들의 이미지들을 배열하는 방식이 실로 탁월하고 효과도 뛰어나다. 당시 전시를 기획한 신양희의 지적처럼 “천장에 매달린 여러 유리-스크린은 역사적 사건의 차이를 담아내면서도, 그럼에도 그것들을 보유한 인민의 경험을 하나의 통일체로 엮어낸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동시에 끊임없는 실패가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잔여의 공간〉은 각기 다른 시기의 운동과 혁명들을 중첩되는 공간 속에 배치함으로써 각각의 이미지들이 공통의 공간을 공유하게 하고 그로 인해 혁명이 존재했고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해줌과 동시에 그것이 끊임없이 실패로 돌아가 잔여로 밖에 존재할 수 없음이 상기되어 양가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이제 다시금 전시장의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전시 전반을 지배했던 깊은 어둠 그리고 죽음은 유토피아를 향한 여러 노력들이 있고, 그 뒤에는 어김없이 좌절이 찾아옴을 전시장 전체에 그리고 있음이 노골적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금 시작하고 이내 또 실패하고 좌절함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즉 좌절과 절망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 순환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전시장 전체에 그려졌음이 상기된다. 항상 실패로 끝나기 때문에 실낱 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아 어찌 보면 극도로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복 속에 진보의 논리, 그리고 작가가 언젠가 필자에게 언급한 얘기를 가져다 쓰면 세상은 “그래도 나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실패가, 그리고 죽음이 우리 앞에 있다 해도 우리는 계속해서 반복하여 유토피아를 꿈꾸고 나아가기를, 반복해서 실패하여 나아가기를 이 전시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보성(미술이론, 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Infinite circulation of (im)possible revolution
A collections and orders of objects, Bricolage
Some ordinary objects around us have even more informations than we think, they often be used as essential materials of experiments to research our past.
As known, the museums are the organisation that collect, research and present, by the curators, ordinary speechless objects be discovered their extra ordinary uses, become historical materials to trace the affections of cultures and also, their spiritual values pursued in each periods. As mentioning of the 'object,' museum,’ and ‘curator,’ saying that the methods of creating art of the artist, Taehun Kang is not further away from how museum curators works. The artist Taehun Kang is well known as his works deliver messages of rephrased meanings of collected objects.
From the objects collected from the first junk yard, rearranged and re-fabricated into sculptures like some modernism pieces 〈Potential space〉(2002), the uniquely placed objet installation work on a chessboard 〈The Rule#2〉(2003), the relocated some ordinary objects those are easy to loose in our daily lives inside a triangle shape which is a metaphoric symbol of the ‘Bermuda triangle’ 〈일상 공간의 삼각형〉(2003), to the sixth solo exhibition 《Obscure gravity》, they are the representatives of the artist’s works that used objet.
But because his experiments contain similar process of curators, it can't be the same. There is a decisive aspect to say the difference between the artist and curators that they intensify the fundamental orders and within the original forms, they realign in scientific methods (even to suggest some new contexts, but the artist Kang rearrange objects by manipulating originalities by creative and allegoric reading of the way of the artist-self.
Between the dark and the dark, an infinite circulation
The artist, Taehun Kang seems to picked a big different appearance in the exhibition,《Remainder in the deeply dark night》. There are only film works installed in the exhibition without any objet works like the artist has been used in the past exhibitions. Of course it is not enough to judged to be different by only the materials, objects to films, have been used in the exhibitions. The methods of the artist shows in this solo exhibition are transforming the appearance and also, the context. It is not the first time that the artist chose films. A couple of month ago, in the curated group exhibition at a non-profit space Amado called 《Antagonistic Monument》, the artist presented a film work, 〈Space of the remainder〉. But until then, it was impetuous to say that the artist experimented a new method, and it seemed more appropriate to say it was simply one of many objets used along with many other objects those represented and captured the moments of strike or protest, not much further from the past works.
The artist recognised the rephrased definitions of objects after the appearance of the digital media so ‘film’ is initiated as only ‘an object’. But this exhibition is different for sure. Instead of editing sone collected films or images, the artist filmed and produced self, constructed and installed.
The exhibition space holds dark and chilled atmosphere as can be imagined from the title 《Remainder in the deeply dark night》 itself. It is assumed that is used to present the film through projectors but that is not the whole reason for dark space. The artist toned down the whole space to represent the night, the deep dark night. The first sight to face when enter the exhibition space is a 9:45 long single channel film work 〈About things can’t be enshrined〉 shows floating hair in between the lines of sand and water on a beach as it reminds of a dead body. Next to that, there is the hair used in the film located inside of a water tank, pre-suggest the viewers will be stepping into an exhibition presenting some death and the ‘remainders of death’.
Another installed film work contains images of greens just before the sunset called 〈In the middle of the dark and dark>. It was filmed with the first person point of view that drives the viewers to experience the film as if they are actually experiencing the happening of the movie, unlike others those give some spaces to viewers for watch the scenes in the movies. This method of filming guides the viewers to feel emotions, the artist intends, and share to point of view directly. There is no float in this film. The running time of the film is 6’50” but it doesn’t make a big difference to watch film starting at any point. So it is batter to be called as moving images rather than calling it film. The work represents one’s point of view in fears and anxiety staring at darkening sky. So the images are not settled to watch one point. It watches around, quickly turns from here to there.
〈Night swimming〉 is another film installation work also, uses the first person point of view that drives the viewers into the images same as 〈In the middle of the dark and dark〉, but only the location has been moved to the water from the green. And it is also, batter to call it a moving image rather than a film. They include the contents with different subject matters. The film shows the precarious movements in and out of the surface of water. These movements create undiscovered tension, make the viewers get fake feelings of suffocation. As we can imagine already from the title 〈Night swimming〉, this film was made just before the darkest dark covers the sky, but the darkness of this film is read closer to a death more than just a darkness created by the sunset. To mention the difference of these two film works, is the installation of the space the viewers run into watch the film that the 〈Night swimming〉 is surrounded by a closed surfaces to exaggerate the fear. Both two works are not much different as they both create fears and anxieties of facing death close to the viewers with each forms of presenting.
As it notifies us from all the characteristics of the works, the artist left the sculptural languages of past, chose new attitudes toward the works, not only uses different methods and objects, but also in the subject which dealing of ‘darkness’ and ‘death’. It is suggested to the viewers of different approach toward the exhibition. Recent works of the artist gives intellectual joy by leading us to diverse conclusions of our own by manipulating the meaning of objects, but this 7th solo exhibition, 《Remainder in the deeply dark night》 pull out direct emotions of fears and panics from us. The constructions of the exhibition hold a clear float as the artist self put it “typical”. 〈About things can’t be enshrined〉 lets us to watch someone’s death as the third, through 〈In the middle of the dark and dark〉 the viewers, the third becomes to experience the scene as the first person, and lastly in 〈Night swimming〉, the main character tries swim away to escape free or face directly of the anxieties which is a ridiculous action in the situation, and this characteristic showed over the exhibition. And some tools placed in the exhibition, for example, at first it started as the point of viewer changes to the point of the first person point of view in 〈In the middle of the dark and dark〉, in 〈Night swimming〉 by the piles of hair, the viewers redelivered to the first and realise the death depicted in 〈About things can’t be enshrined〉 was not others but it was mine, and the ambiguous emotion caused of this redirect the viewers in the circulation of the exhibition floats.
The artist Taehun Kang tries many changes by using different sculptural language s through the exhibition 《Remainder in the deeply dark night》, unlike the exhibitions of past. And deviate from dealing each specific issues of the systems of society in reality, chose rather metaphysical issue of ‘darkness’ and ‘death,' suggested a whole new dimensional message to us. But it is hard to say that the pursuance of the artist’s approach toward artistic message has been changed.
The possibility and impossibility of a revolution
The exhibition leads to the work 〈Space of the remainder〉 that has been shown once in the recent exhibition in the corner which sort of breaks away from the circulation after dragged by the circulation of the float, and it refreshes the atmosphere of whole. And by that, the atmosphere of metaphoric darkness and death becomes our reality. As it is mentioned earlier, these film works are still including the methods of the artist has been used such as collecting, allegoric analysis, rearranging, and many movements and revolutions that Kang has been collected from the world expressed as unique analysation through film installation. These movements are each from different periods and the rearrangements of images are truly effective. As the curator of the exhibition said "Those class screens hanging from the ceiling contains the differences of each historical periods, yet still connect them as one unification of the experience of the citizen." So this work stimulates the viewers of utopian imaginations, and enlightens the existence of failure.
In other words, the exhibition, 〈Space of the remainder〉 revisits the emotions of being the failure and staying as remainder by the repetitions of trying and failing process of each different periods’ movements that are supposed to be possible to achieve and exist the revolution.
Now, let us remind those works in the exhibition. The darkness and the death ruled over the space brings hard the efforts toward the utopia, and behind it, followed by the certain failure. And it shows the fact shows in the exhibition space, to overcome those, the process repeats over and over, nonetheless of the repetitions of frustration and despair, it keeps happening again. It always happens to be fail, so there is no tiny bit of hope, make it extremely desperate. But in this repetition, the pursuance if the artist Taehun Kang has liberal logic, and the artist once said " but still the world progresses ." So the failure, and the death awaits us in front but we need to keep try and repeat the fail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