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없는 생활들, 모험들 Life, no Peace, only Adventure
부산시립미술관 2층
2011. 12. 17 - 2012. 2. 12
부산시립미술관 2층
2011. 12. 17 - 2012. 2. 12
이 전시는 경제관념으로 환원된 오늘날의 행복에 대한 단상에서 시작한다. 개개인의 일상에 침투한 자본의 논리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고 있는지에 대한 접근인 셈이다. 동시대의 몇몇 예술가들은 개인의 행복이 경제주의 차원으로 환원되는 현상에 초점을 두면서, 행복의 조건들을 성립시키고 있는 현실에 의문을 품는다.
한편으로 예술가들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 그토록 간절한 행복은 어떤 장치들에 의해 작동되는 가에 더 관심이 많다. 개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행복이라는 테제는 단순히 개인적 욕망의 차원을 넘어 사회와의 관계망 속에서 발생한 하나의 지배체제이며, 우리는 그러한 체제 안에서 스스로를 관리하고 통제해 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60, 70년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은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의 경제성장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등식을 유포하여 개개인을 하나의 국민 집단으로 불러들임으로써 개인과 그가 속한 가정마다의 근검절약을 강요하는 하나의 지배체제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 시절 개인들에게 삶이란 오로지 국가의 성장에 봉사함으로써 나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고, 나의 행복은 곧 국가의 안녕이라는 거시적인 틀 안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80, 90년대 들어서면서, 행복은 목숨을 건 시위와 피 섞인 투쟁으로 쟁취하여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국가지배체제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개성, 그리고 개별적인 욕망을 쟁취하는 것이었으며, 더 이상 국가와 나의 삶을 동일시하는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과격한 시위나 투쟁 없이도 행복을 얻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이상 국가의 안녕을 걱정해야 하는 국민이 아니라 국가 지배체제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세계시민이 되었다. 우리에겐 오직 자신을 위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고 전 세계 어느 곳이든 나의 욕망을 실천하는 무대가 될 수 있으며 단지 “내 꿈을 펼쳐라”라는 미시적인 명령을 받을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해 꿈을 펼칠 수 있는 무한한 자유이자 모든 책임이다. 나는 나의 삶을 경영하는 주체이자, 나의 삶의 관리인이고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행복 쟁취를 위한 합리적인 자기 경영이란 자신을 고품질의 노동력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것의 다른 말로써, 그것은 마치 높은 수익률이 기대되는 상품을 생산하는 것과 동일한 구조에 놓이게 된다. 이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속성이 들춰지는데, 그 자유란 생존을 위해 무한경쟁에 뛰어들기를 강요하는 자유로써, 노동, 취미, 교육, 결혼, 소비와 같이 개개인의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영역들, 심지어 먹고 자고 휴식하는 원초적 행위조차 ‘행복한 삶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관리할 수 있는 자유이자, 궁극적으로 나의 꿈과 행복 성취를 위해 나의 신체, 감정, 욕망 같은 것을 억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역설적 자유이다. 또한 더 많은 자본에 의해 더 나은 생산구조를 설계할 수 있도록 짜여진 자산가적 자유이며 그러한 자유는 제한적이고 탈환으로서만 가능하며 자기 강박을 불러오는 자유이다. 삶이 궁극적으로 행복의 이름으로 둘러져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무한 매진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은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구조에서 자기성취에 실패한다는 것은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며 그러한 시민은 소외되고 배제되어 마땅하다.
이렇듯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신자유’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지배체제 안으로 구속하는 오늘날의 지배방식은 일상의 영역에서 개인의 윤리관을 형성하기에 통제하기에 벗어나기 어렵고, 지배 하에 놓여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없도록 한다는 점에서 세련된 것이며, 개인으로부터 가족집단, 도시집단, 나아가 국가집단을 자생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다. 이처럼 정교한 방식의 지배체제가 작동하는 곳에서 우리는 어쩌면 안녕이 없는 생활들을 연속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안녕을 위해 삶을 모험해 나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전시는 오늘날 이같이 우리를 둘러싼 일상적인 지배체제에 반응하는 예술가들의 응답에서 시작된다. 일상 혹은 생존과 밀접한 영역에서 체제에 대항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일상의 전방위적인 영역에 침투하여 작동하는 지배체제일수록 체제를 거스르는 것조차 다시 체제 안으로 흡수하는 역학관계를 발휘한다. 이미 우리는 그 안에 있고, 단지 그 안에서 다채로운 모험을 해나갈 뿐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영상, 출판, 퍼포먼스, 방송, 투어, 다큐멘터리, 리서치 등 다양한 매체로, 협업, 연대, 게릴라, 참여, 초대 등 대안의 방식을 통해 오늘날 이와 같은 개개인의 삶의 형식과 조건에 대해 살피고, 제안하며, 공유한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하며, 결국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성공이나 실패와 같은 단어와는 관련이 없다. 우리에게 삶은 곧 모험 자체이며, 이것이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온갖 체제에 응답하는 예술가들의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쫓고 있는 모든 것들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행복이 아니라 특정 프레임 안에 갇힌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는 팀스크래치다. 이들은 이제 막 우리 시대의 수장이 연설을 끝내고 내려온 듯한 텅 빈 단상과 그 주변에 걸린 현수막은, 비로소 국가나 사회의 역할이 축소되고 모든 것이 개개인의 자유와 책임으로 전환된 오늘날의 새로운 이념과 그 정체를 확인하게 한다. 즉, ‘세계화’나 ‘신자유주의’와 같은 개념은 시장경제 체제로 바뀐 삶 안에서(시장 경제의 창달) 국민 개개인이 자유로운 주인이 되어(자유민주주의 정착) 스스로의 안녕을 책임지는 국가를 건설(복지국가 건설)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 시대의 수장은 개개인을 세계시장으로 내모는 자본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자유’를 통해 언제나 자기억압과 통제를 동반한 끊임없는 ‘자기 관리’를 ‘주도’하는 실제이다. 팀스크래치는 이러한 오늘날의 상황을 어린 아이의 구슬픈 목소리가 불러내는 새마을운동 가요, ‘잘살아보세’와 교차시키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국가의 경제 성장을 위해 국민의 실생활을 통치했던 종전의 지배체제와 연결하는 동시에 더 이상 국가의 개입 없이 ‘누가 누가 잘하나’를 관전할 수 있는 더욱 세련된 지배체제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곳에는 진정한 자유도 진정한 행복도 존재하지 않으며 마치 얇은 커튼사이로 보이는 단상을 지탱하는 다리처럼, 얼키고설킨 잘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전술이 있을 뿐이다.
이광기는 ‘나는 엄마에게 속았어요’라고 고백하고, ‘내가 니를 어찌 키웠는데’라고 하소연하는 다소 도발적인 출판을 시도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오늘날의 일상 속 지배체체를 폭로하고 오늘날 수많은 자기개발서가 숨기고 있는 1등주의에 대한 환상을 들춰낸다. 적나라한 제목과는 반대로 책의 내부는 비어있다. 그의 출판은 어떤 특정한 부모-자식의 개별 삶에 대한 하소연이거나 그러한 삶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더욱 아니며, 오히려 개인의 사적 고백이 최소한 가십의 소재가 되려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둘러싼 외부를 대면하게 한다. 한마디의 문구는 어떠한 풍부한 스토리 보다 적나라하고 간명하게 서로의 관계를 드러내 준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1등이 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어디서든 어떤 관계에서든 무한 경쟁 속으로 내몰 수밖에 없는 부모들과 내몰릴 수밖에 없는 자식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배형식이 일상의 도덕 속에 침투함으로써 그것에 반항하려는 의지는 자기반성 안으로 숨어버린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불투명함은 일상의 도덕에 복종함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되는데, ‘착한 자식이 되어라’는 ‘끊임없이 그리고 남보다 더 충실히 미래를 준비하라’는 명령이 되어 지속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구민자는 통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제시하려는 국가적 의지와 개별 삶의 불일치를 체감하게 하는 퍼포먼스를 행한다. 물론 우리가 국가 혹은 각종 리서치기관에 의해 제공되는 통계자료에 의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통계수치가 우리의 삶으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박탈감을 맞게 하는지 이미 경험적으로 안다. 그것은 진짜인지 가짜인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환상적 실재로 다가오는데, 역설적으로 그러한 수치들은 자기 개발의 의지를 부추기고, 자기 관리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데 도움을 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관리하여 예컨대, ‘아침형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을 발명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결코 국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자유에 의해서 작동되는 오늘날의 지배 시스템을 드러내는 수많은 예들 중에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성공한 삶을 위해서 개인은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자기억압과 자기통제없이 불가능한 ‘신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대는 모든 개개인의 일상을 미래를 위한 투자로 탈바꿈시키는데 특히, 오늘날 ‘결혼’이 ‘운명’으로 포장된 채 ‘시장’이라는 단어와 결합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구민자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마치 상품의 모든 정보를 가리듯 어떠한 외적 조건도 감춘 ‘맞선 퍼포먼스’를 행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가 결코 타인의 진정한 주체성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욱 아무것도 알 수 없게 하는 모호함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아이러니를 만나게 된다.
너 자신을 개발하라는 명령을 돕는 더 강력한 미디어는 TV이다. 김혜지와 다수의 여성작가들이 참여한 벡터스페이스 프로젝트<Celebration of Girlishness : 소녀배우기>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훈육되어지는 우리의 욕망에 관한 탐구이다. 문화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 그룹 ‘소녀시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TV에 공개되면서부터 여성은 언제나 상품으로서 여성성의 정점에 놓인 ‘소녀 되기’를 강요받았다. 이미 우리는 ‘소녀시대’의 소녀가 환상일 뿐이며 그것은 상품화 전략에 의해 만들어졌고 현실에 그러한 소녀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마치 현실의 수많은 소녀들 혹은 여성들은 자신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이 되지 못했거나 그러기에 부족한 것처럼 존재하고 그것이 정해놓은 ‘완벽한 소녀-여성되기’를 원하고 따라한다. <Celebration of Girlishness : 소녀배우기>가 보여주는 소녀시대는 하나의 단적이 예이며, 우리 모두는 일상 곳곳에서 자신을 상품화하려는 전략을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한데, 즉 미래의 가장 잘 팔리는 상품-노동자로서 자신을 내다팔기 위해 (이미 안정된 상품으로써 가치를 평가받고 있는) TV속에서 롤-모델을 찾으며, 그처럼 외모를 가꾸고 능력을 개발하고 그처럼 살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일들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심지어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강태훈은 생활세계 속에서 우리가 강력하게 추구하는 것들, 예컨대 가족, 행복, 성공, 쾌락 같은 것이 얼마나 많은 위험들에 노출되어 있는지 일상의 상징적 오브제들을 통해 들춰낸다. 한동안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유명인의 자살 소식은 행복한 삶을 지키기 위한 조건들이 동시에 ‘삶보다 나은’ 죽음으로 향하는 도구가 되어가는 것을 보게 했고(<행복-안죽음#2>), 더 나은 삶이라는 환상은 탈환으로서만 충족되는 무한 이기주의의 삶이라는 불안하고 기형적인 것이 되기를 막지 않는다(<행복-안죽음#1>).
그토록 간절한 ‘행복한 중산층 가정’이란 화려한 샹들리에가 한순간 추락함으로써 화목했던 가족을 분열시키고 괴기스러움 속으로 빠져들 듯 허약한 것일 뿐이다(<행복-가족>). 그는 삶의 목표로서 행복은 기괴한 웃음소리만 낼 뿐 실체가 드러나지 않으며 검은 베일에 싸인 채 오히려 불쾌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행복-없음>). 오히려 행복 같은 것은 없다고 재정의함으로써 체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의 실재에 좀더 근본적으로 다가갈 필요를 역설한다. 2011년의 3.11 대참사를 기록한 후쿠시마 원전 이미지를 뒤로 한 채 실내용 운동기구에 앉아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자기관리에 열중하는 일상의 모습에서 행복의 우스꽝스러움, 위험성, 모순의 속성은 주저 없이 드러난다.(<행복-우연성>)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려는 행복은 이율배반의 모습을 가졌다. 이해민선의 멸치산수-왈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냄비 물에 담긴 마른 멸치는 그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물속에서 헤엄을 치고, 물이 가열될수록 심한 요동에 몸부림을 떤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이러한 움직임은 쇼스타코비치의 장엄하고 비극적인 왈츠에 몸의 리듬을 맞춤으로써 더욱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데 그럼에도 왠지 모를 씁쓸함을 남긴다. 있는 대로 육수를 뽑아낸 멸치는 물이 다 증발하자 마치 한 장의 여유로운 산수화로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는 죽음에 죽음을 맞이한다. 모순에 모순을 거듭하는 삶의 과정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심각하다기보다 오히려 허탈한 웃음을 유발한다. 한편, 이해민선은 <House and Home> 에서는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마련한 일상의 주거 공간 안에서 통제되고 억압받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공동주택이라는 주거공간은 우리에게 익숙한 집이자 우리를 둘러싼 거의 모든 일상 세계를 압축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체성을 형성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사회 공동체를 형성해 나간다. 일상 속에서 구속과 통제는 우리의 몸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키는 동시에 그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을 비틀게 하며 통제의 살들을 덧붙여 나가면서 우리를 성장시켜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환영으로서의 영상이 아닌 실제 영상이 투사된 전시장 모서리와 같은 실재를 만났을 때, 체제에 의해 성장된 ‘나’들은 난관에 부딪치게 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이해민선은 체제 내에서 축적한 살들을 버리거나 그곳에서 좌절하기보다 그것으로부터 가벼운 날개를 만들어 이 체제 바깥을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은 오재우의 <물로 쓴 슬로건>에서 더 잘 드러난다. 전쟁과 같은 세계적 이슈를 포함하여 미군주둔과 FTA체결과 같은 국내의 정치적 문제와 심지어 등록금 인상처럼 일상의 이슈들조차도, 쉼 없이 다가오는 나의 치열한 하루하루 앞에 그것은 의미 없는 외침일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의 곳곳에는 우리를 일상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치열한 하루하루에 가두는 지배의 논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정물-오일>에서 보듯 세계적인 분쟁 앞에서 한편의 시를 읊조리는 것 마냥 위험하며 역설적이다. 그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일상적인 기호들, 예컨대 과자, 음료수나 담배, 책 같은 것의 상표에서 세계경제권을 둘러싼 국가간의 정치적 분쟁을 읽어낸다. 오늘날 개인은 곳곳에서 스마트한 소비주체로 불러들여지고 어디에서든 귀한 고객이 되어 자신의 선택적 취향에 의해 일상적인 상품들을 구매한다고 굳게 믿지만, 상품은 언제나 오일분쟁처럼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고 있고 그것은 지배와 권력을, 욕망과 착취를 위해 봉사한다. 궁극적으로 더욱 스마트한 소비주체가 되기 위해 매순간 매진하도록 강요받는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는 더 좋은 노동력-상품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꿈(Dream), 평화(Peace), 희망(Hope)과 같은 낭만적인 기호들로 제시된 상품을 구매하듯 자신의 꿈, 평화, 희망을 쟁취하기 위해 매순간을 투자하며, 그럼으로써 일상 속에 머물 수 있게 하고 아무런 문제없이 소비할 수 있게 하며 마치 그것이 오늘날의 미덕인 것처럼 보인다.
그토록 열정을 다해 우리가 쫓고 있는 것은 사실 무엇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며 단지 없는 것을 쫓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문은 박제성의 <공> 작업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선수들이 쫓는 공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작업을 통해 그러한 의문을 시각화한다. 공(空)은 행복이 될 수도, 성공이 될 수도, 1등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말그대로 비어있는 환상이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는 한편 오늘날 정치, 철학, 종교 분야에서의 대표적인 우상으로 대두되고 있는 오바마, 슬라보예 지젝, 달라이 라마와 같은 인물들에 주목한다. 그들이 시대를 진단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연설이나 인터뷰 영상에서 언어를 삭제한 후 손짓이나 한 숨 혹은 언어 사이의 빈 시간만을 모아 영상을 재구성하는데, 말이 사라지고 새롭게 구성된 영상 안에서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처한 상황의 다급함과 극박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만 한편으론 갑갑하고 불편하며 희화화 된 채 그려진다. 박제성은 이러한 작업의 제목을 <그의 침묵>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들이 그토록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인지에 대해 새삼 관심 갖게 하는 동시에 시대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수많은 이론가와 정치가, 종교인들이 우리에게 부재한 채로 존재하거나 의미 없이 다가오는 오늘날의 상황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옥인콜렉티브는 우리의 생활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삶의 조건, 사회적 조건들에 좀 더 깊숙이 다가간다. 이들은 실제로 사적인 거주의 영역이 재개발로 인해 공적인 삶 영역으로 옮아가게 되는 과정에 처함으로써, 체제에 의해 억압받는 일상을 발견하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일상 속에 많은 이들을 초대하고 서로 연대하며 새로운 예술가적 그룹을 형성한다. 이들은 또한 옥인인터넷라디오〔STUDIO+82]를 개설하여 불특정다수에게 일상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송함으로써 더 많은 이들을 이곳으로 초대하고 더 많은 이야기들로 커뮤니티를 구성해나가고자 한다. 이곳에서는 도시 계획과 주거 공간, 소비와 취향과 같이 전방위적인 일상적 주제와 경험들 사이에서 갖가지 이야기들이 오가는데, 예컨대 돈이 삶을 선택하고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돈 없이 가치를 교환하는 방식을 실험하거나 신자유주의 사회가 정의하는 자유에 대항하여 진정한 자유의 방식을 상상하고, 복지정책이 억압하고 있는 인권에 대해 토론을 한다. 체제에 대항하여 과격한 시위를 이끌거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선동하는 장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 삶을 존중하는 동시에 우리가 처한 사소한 삶의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개인이 처한 일상 속에서 자신의 호기심과 의심이 자발적인 참여와 강제하지 않는 연대를 이끌고 이것이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협업의 중요한 키워드가 될 때, 삶은 경쟁에서 벗어나 미세한 변화들로 진동할 수 있는데, 옥인콜렉티브는 그러한 상태를 경험하고자 한다.
개인이 소비주체이자 노동력-상품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면 현대인의 생활공간인 도시는 소비도시이자 관광-상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으로써 개개인이 경쟁구도에 내몰린 것처럼 도시 또한 또 다른 도시와 경쟁한다. 수많은 도시는 이미 문화산업에 의해 경쟁하는 관광지로 변했고 저마다의 캐치프레이즈로 관광객으로써 이방인을 불러들이며 이곳에서 더 많이 소비할 것을 강요한다. 김장프랙티스는 지역으로서의 많은 도시들이 자신을 광고하는 안내서에서 결코 그 도시의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모순을 발견하는데, 예컨대 그들은 인천시가 안내하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려하고 이국적인 이미지와 달리 지방의 쇠락한 공간으로서 차이나타운을 경험한다.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저마다의 도시 광고는 어딘지 닮아 있음에도 유일하다거나 특별함을 강조하지만 우리가 개별 도시에서 만나는 것 역시 상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곳에서 실제 삶과 연결된 새로운 지역안내서 만들기라는 어떤 실천을 행한다. 비록 그러한 실천적 행위에서조차 기존 체제에 의해 습득한 경험과 시선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그 실천은 무모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견고하다고 믿어지는 것들의 틈 사이를 발견하고 그것을 확장해가면서 자신들의 언어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노력이나 체제에 부스러기를 내려는 그들의 전략 자체에 이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와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에 대한 김장프랙티스의 해석과 의미의 관계망을 엮어나간 <안녕 없는 생활들, 모험들 개요> 작업 과정 역시 이러한 그들의 중요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지역으로 명명되는 수많은 도시들이 저마다의 캐치프레이즈로 문화산업에 열을 올릴 때, 삶의 공간인 도시는 또한 도시-삶-재개발과 같은 이름으로 경쟁구도에서 수많은 ‘낙후’된 것 혹은 ‘낙오’된 것을 쓸어낸다. 열악하고 노후한 도시환경을 정비하여 안락한 주거지 조성과 상권 활성화를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곳곳의 도시-삶-재개발은 수많은 철거민을 양산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최소한의 주거환경이나 생계 터전을 정부로부터도, 누구로부터도 보장받지 못하는 세입자들로, 갈 곳이 없거나 갈 수 없는 상황에서 퇴거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그 상황은 그들에게 말그대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이 상황은 철거민만이 감당해야할 비극이 아니라 오늘날 젊은 예술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우리들’이 처한 고통, 공포, 절망감을 이 상황이 대변하고 있으며 우리가 곧 철거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남긴다. 철거용역에 대항하며 그곳의 세입자가 되어 많은 젊은이들, 젊은 예술가들이 공연을 하며 함께 밤을 지새우는 철거 현장은 바로 지금 눈앞의 공포에 맞서고 삶과 죽음 앞에 심장이 터질 듯한 감정의 극한을 경험하며 또한 그 자체로 우리들이 노동해야할 현장이자 그것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쾌락이며 우리의 일상인 상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파트타임스위트는 전시장 내 13평 클럽을 만들어 생활의 공간이자, 노동의 공간이며, 쾌락의 공간으로서의 철거현장과 같은 삶의 재연이다. 이들에게 체제에 맞서는 방식으로서 삶은 피로 점철된 투쟁이기보다 행진댄스와 같이 사태를 지연시키는 운동성으로 혹은 고통을 덜어내는 예술적 승화로서 지속가능하다.
리슨투더시티는 도시의 삶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더욱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정부에서 추진 중인 4대강 사업은 친환경적 사업을 표방하지만 경제효과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서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 리슨투더시티는 4대강 사업의 홍보를 자처하는데, 마치 자신들이 하나의 여행사가 되어 투어상품을 개발하듯 4대강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연혁으로 정리하고 인쇄물을 배포하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시선을 끌고 기념상품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등 오늘날 삶을 관광으로 변환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역이용함으로써 자신들이 기획한 ‘4대강 투어상품’을 통해 강 주변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린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았지만, 그 안에는 목숨을 건 혹독한 노동과 치열한 경쟁이 늘 따라다니고 있었으며, 심지어 눈앞에서 펼치지는 파괴현장에 대한 자기분열을 경험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존재했다. 이들에게 보상이라곤 최소한의 생계유지비거나 자식의 대학등록금이며 혹은 그런 것을 포기하고 언제든 일을 관둘 수 있고 해고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경제성장이나 경쟁력강화와 같은 이름으로 국가와 기업은 여전히 국민과 민족을 불러들이는 듯하지만, 오늘날 호명되는 국민이란 ‘유연한 노동력’을 제공해 줄 개인들인 것이다. 한편 2011년 한 인간으로 하여금 309일 동안 크레인 위에서 고공투쟁을 벌이게 했던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정리해고 사태와 그를 지지하며 전국에서 몰려든 희망버스는 유연한 노동력 앞에 살고 죽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진 우리시대를 직시하게 한 사건으로, 리슨투더시티는 그가 살았던 크레인 위의 방을 재연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살아가야 하는지 물음을 던지고 있다.
2011년 일본의 3.11 원전사고는 국가와 기업이 호명한 국민들이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재해를 입은 잔혹한 참사현장을 전세계적으로, 실시간으로 증명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침↑폼은 원전사고가 일어난 지 한 달 만인 2011년 4월 11일, 방호복을 입고 후쿠시마로 향한다. 사고 이후 재해지역에는 복구 작업을 위해, 그리고 생존을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방호복을 입고 후쿠시마로 향했다. 그들처럼 침↑폼도 방사능에 노출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겹겹이 방호복을 착용하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질식할 정도의 숨 막힘이 온 몸을 에워싼다. 그들은 국가가 그토록 자랑하고 도쿄전력이 안전을 보장한 원자력발전소의 제1호 망루에 올라 하얀 깃발을 꺼내 펼치고는 붉은색 락카로 처음엔 일장기를, 그다음엔 방사능 마크를 그린 후 마치 백기를 흔들 듯 깃발을 흔드는 퍼포먼스를 행한다. 1945년 원폭투하에 의해 백기를 든 제국-일본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원폭투하를 계기로 자국민을 피해자로만 내재화했던 일본-국가는 3.11 이후 외부가 아닌, 국가 내부로부터의 참사를 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망루를 내려와 인접한 곳에 방호복을 입은 허수아비를 세움으로써 아직도 살아있는 후쿠시마의 수많은 노동-희생자를 상기하도록 한다. 침↑폼은 시부야역에서 펼친 또 다른 게릴라 퍼포먼스 <LEVEL 7 feat. Myth of Tomorrow>를 통해, 이 상황을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대중의 논쟁을 부추기며 예술가로서 자신들의 의무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문경원은 <박제>라는 상상적인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옛 기무사터라는 물리적 공간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관계시킨다. 그곳은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통의 장이었고, 한국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국민들의 생활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권력기관으로서 군림하게 되는데, 2000년대에 이곳은 이 시대의 문화맥락을 짚어낼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갈림길에 서 있다. 작가는 이 독특한 공간의 서사를 놓치지 않고 사실적 자료와 상상적 이미지를 교차시키며 풀어낸다. 웅장하고 짜임새 있는 영상의 전 과정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작업에서 가장 눈여겨 볼 지점은, 무엇보다 끄트머리에 덧붙은 왈츠를 추는 무용수와 이들을 중심으로 기무사를 둘러싼 현대 도시의 개발 현장이 교차하면서 드러나는 내레이션이다. 우리는 이렇듯 현재의 시점에서, 지난날의 ‘감시와 억압의 국가권력’이라는 서사를 수면 아래로 묻어두고 현재의 시점에서 ‘비로소 국민이 주체가 되어 자유로운 문화와 일상 그리고 역사가 연결되는 지금... ’을 맞이하고 있다. <박제>는 이 ‘지금’을 전개하지 않고 끝나지만, 누군가에 의해 현재의 모습은 새로운 명명과 해석을 달고 역사가 되어 서사 될 것이다. 과연 그 날의 오늘 이 ‘자유로운 문화와 일상’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예술가들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 그토록 간절한 행복은 어떤 장치들에 의해 작동되는 가에 더 관심이 많다. 개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행복이라는 테제는 단순히 개인적 욕망의 차원을 넘어 사회와의 관계망 속에서 발생한 하나의 지배체제이며, 우리는 그러한 체제 안에서 스스로를 관리하고 통제해 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60, 70년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은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의 경제성장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등식을 유포하여 개개인을 하나의 국민 집단으로 불러들임으로써 개인과 그가 속한 가정마다의 근검절약을 강요하는 하나의 지배체제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 시절 개인들에게 삶이란 오로지 국가의 성장에 봉사함으로써 나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고, 나의 행복은 곧 국가의 안녕이라는 거시적인 틀 안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80, 90년대 들어서면서, 행복은 목숨을 건 시위와 피 섞인 투쟁으로 쟁취하여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국가지배체제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개성, 그리고 개별적인 욕망을 쟁취하는 것이었으며, 더 이상 국가와 나의 삶을 동일시하는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과격한 시위나 투쟁 없이도 행복을 얻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이상 국가의 안녕을 걱정해야 하는 국민이 아니라 국가 지배체제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세계시민이 되었다. 우리에겐 오직 자신을 위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고 전 세계 어느 곳이든 나의 욕망을 실천하는 무대가 될 수 있으며 단지 “내 꿈을 펼쳐라”라는 미시적인 명령을 받을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해 꿈을 펼칠 수 있는 무한한 자유이자 모든 책임이다. 나는 나의 삶을 경영하는 주체이자, 나의 삶의 관리인이고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행복 쟁취를 위한 합리적인 자기 경영이란 자신을 고품질의 노동력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것의 다른 말로써, 그것은 마치 높은 수익률이 기대되는 상품을 생산하는 것과 동일한 구조에 놓이게 된다. 이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속성이 들춰지는데, 그 자유란 생존을 위해 무한경쟁에 뛰어들기를 강요하는 자유로써, 노동, 취미, 교육, 결혼, 소비와 같이 개개인의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영역들, 심지어 먹고 자고 휴식하는 원초적 행위조차 ‘행복한 삶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관리할 수 있는 자유이자, 궁극적으로 나의 꿈과 행복 성취를 위해 나의 신체, 감정, 욕망 같은 것을 억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역설적 자유이다. 또한 더 많은 자본에 의해 더 나은 생산구조를 설계할 수 있도록 짜여진 자산가적 자유이며 그러한 자유는 제한적이고 탈환으로서만 가능하며 자기 강박을 불러오는 자유이다. 삶이 궁극적으로 행복의 이름으로 둘러져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무한 매진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은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구조에서 자기성취에 실패한다는 것은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며 그러한 시민은 소외되고 배제되어 마땅하다.
이렇듯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신자유’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지배체제 안으로 구속하는 오늘날의 지배방식은 일상의 영역에서 개인의 윤리관을 형성하기에 통제하기에 벗어나기 어렵고, 지배 하에 놓여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없도록 한다는 점에서 세련된 것이며, 개인으로부터 가족집단, 도시집단, 나아가 국가집단을 자생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다. 이처럼 정교한 방식의 지배체제가 작동하는 곳에서 우리는 어쩌면 안녕이 없는 생활들을 연속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안녕을 위해 삶을 모험해 나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전시는 오늘날 이같이 우리를 둘러싼 일상적인 지배체제에 반응하는 예술가들의 응답에서 시작된다. 일상 혹은 생존과 밀접한 영역에서 체제에 대항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일상의 전방위적인 영역에 침투하여 작동하는 지배체제일수록 체제를 거스르는 것조차 다시 체제 안으로 흡수하는 역학관계를 발휘한다. 이미 우리는 그 안에 있고, 단지 그 안에서 다채로운 모험을 해나갈 뿐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영상, 출판, 퍼포먼스, 방송, 투어, 다큐멘터리, 리서치 등 다양한 매체로, 협업, 연대, 게릴라, 참여, 초대 등 대안의 방식을 통해 오늘날 이와 같은 개개인의 삶의 형식과 조건에 대해 살피고, 제안하며, 공유한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하며, 결국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성공이나 실패와 같은 단어와는 관련이 없다. 우리에게 삶은 곧 모험 자체이며, 이것이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온갖 체제에 응답하는 예술가들의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쫓고 있는 모든 것들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행복이 아니라 특정 프레임 안에 갇힌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는 팀스크래치다. 이들은 이제 막 우리 시대의 수장이 연설을 끝내고 내려온 듯한 텅 빈 단상과 그 주변에 걸린 현수막은, 비로소 국가나 사회의 역할이 축소되고 모든 것이 개개인의 자유와 책임으로 전환된 오늘날의 새로운 이념과 그 정체를 확인하게 한다. 즉, ‘세계화’나 ‘신자유주의’와 같은 개념은 시장경제 체제로 바뀐 삶 안에서(시장 경제의 창달) 국민 개개인이 자유로운 주인이 되어(자유민주주의 정착) 스스로의 안녕을 책임지는 국가를 건설(복지국가 건설)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 시대의 수장은 개개인을 세계시장으로 내모는 자본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자유’를 통해 언제나 자기억압과 통제를 동반한 끊임없는 ‘자기 관리’를 ‘주도’하는 실제이다. 팀스크래치는 이러한 오늘날의 상황을 어린 아이의 구슬픈 목소리가 불러내는 새마을운동 가요, ‘잘살아보세’와 교차시키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국가의 경제 성장을 위해 국민의 실생활을 통치했던 종전의 지배체제와 연결하는 동시에 더 이상 국가의 개입 없이 ‘누가 누가 잘하나’를 관전할 수 있는 더욱 세련된 지배체제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곳에는 진정한 자유도 진정한 행복도 존재하지 않으며 마치 얇은 커튼사이로 보이는 단상을 지탱하는 다리처럼, 얼키고설킨 잘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전술이 있을 뿐이다.
이광기는 ‘나는 엄마에게 속았어요’라고 고백하고, ‘내가 니를 어찌 키웠는데’라고 하소연하는 다소 도발적인 출판을 시도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오늘날의 일상 속 지배체체를 폭로하고 오늘날 수많은 자기개발서가 숨기고 있는 1등주의에 대한 환상을 들춰낸다. 적나라한 제목과는 반대로 책의 내부는 비어있다. 그의 출판은 어떤 특정한 부모-자식의 개별 삶에 대한 하소연이거나 그러한 삶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더욱 아니며, 오히려 개인의 사적 고백이 최소한 가십의 소재가 되려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둘러싼 외부를 대면하게 한다. 한마디의 문구는 어떠한 풍부한 스토리 보다 적나라하고 간명하게 서로의 관계를 드러내 준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1등이 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어디서든 어떤 관계에서든 무한 경쟁 속으로 내몰 수밖에 없는 부모들과 내몰릴 수밖에 없는 자식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배형식이 일상의 도덕 속에 침투함으로써 그것에 반항하려는 의지는 자기반성 안으로 숨어버린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불투명함은 일상의 도덕에 복종함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되는데, ‘착한 자식이 되어라’는 ‘끊임없이 그리고 남보다 더 충실히 미래를 준비하라’는 명령이 되어 지속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구민자는 통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제시하려는 국가적 의지와 개별 삶의 불일치를 체감하게 하는 퍼포먼스를 행한다. 물론 우리가 국가 혹은 각종 리서치기관에 의해 제공되는 통계자료에 의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통계수치가 우리의 삶으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박탈감을 맞게 하는지 이미 경험적으로 안다. 그것은 진짜인지 가짜인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환상적 실재로 다가오는데, 역설적으로 그러한 수치들은 자기 개발의 의지를 부추기고, 자기 관리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데 도움을 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관리하여 예컨대, ‘아침형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을 발명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결코 국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자유에 의해서 작동되는 오늘날의 지배 시스템을 드러내는 수많은 예들 중에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성공한 삶을 위해서 개인은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자기억압과 자기통제없이 불가능한 ‘신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대는 모든 개개인의 일상을 미래를 위한 투자로 탈바꿈시키는데 특히, 오늘날 ‘결혼’이 ‘운명’으로 포장된 채 ‘시장’이라는 단어와 결합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구민자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마치 상품의 모든 정보를 가리듯 어떠한 외적 조건도 감춘 ‘맞선 퍼포먼스’를 행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가 결코 타인의 진정한 주체성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욱 아무것도 알 수 없게 하는 모호함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아이러니를 만나게 된다.
너 자신을 개발하라는 명령을 돕는 더 강력한 미디어는 TV이다. 김혜지와 다수의 여성작가들이 참여한 벡터스페이스 프로젝트<Celebration of Girlishness : 소녀배우기>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훈육되어지는 우리의 욕망에 관한 탐구이다. 문화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 그룹 ‘소녀시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TV에 공개되면서부터 여성은 언제나 상품으로서 여성성의 정점에 놓인 ‘소녀 되기’를 강요받았다. 이미 우리는 ‘소녀시대’의 소녀가 환상일 뿐이며 그것은 상품화 전략에 의해 만들어졌고 현실에 그러한 소녀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마치 현실의 수많은 소녀들 혹은 여성들은 자신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이 되지 못했거나 그러기에 부족한 것처럼 존재하고 그것이 정해놓은 ‘완벽한 소녀-여성되기’를 원하고 따라한다. <Celebration of Girlishness : 소녀배우기>가 보여주는 소녀시대는 하나의 단적이 예이며, 우리 모두는 일상 곳곳에서 자신을 상품화하려는 전략을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한데, 즉 미래의 가장 잘 팔리는 상품-노동자로서 자신을 내다팔기 위해 (이미 안정된 상품으로써 가치를 평가받고 있는) TV속에서 롤-모델을 찾으며, 그처럼 외모를 가꾸고 능력을 개발하고 그처럼 살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일들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심지어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강태훈은 생활세계 속에서 우리가 강력하게 추구하는 것들, 예컨대 가족, 행복, 성공, 쾌락 같은 것이 얼마나 많은 위험들에 노출되어 있는지 일상의 상징적 오브제들을 통해 들춰낸다. 한동안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유명인의 자살 소식은 행복한 삶을 지키기 위한 조건들이 동시에 ‘삶보다 나은’ 죽음으로 향하는 도구가 되어가는 것을 보게 했고(<행복-안죽음#2>), 더 나은 삶이라는 환상은 탈환으로서만 충족되는 무한 이기주의의 삶이라는 불안하고 기형적인 것이 되기를 막지 않는다(<행복-안죽음#1>).
그토록 간절한 ‘행복한 중산층 가정’이란 화려한 샹들리에가 한순간 추락함으로써 화목했던 가족을 분열시키고 괴기스러움 속으로 빠져들 듯 허약한 것일 뿐이다(<행복-가족>). 그는 삶의 목표로서 행복은 기괴한 웃음소리만 낼 뿐 실체가 드러나지 않으며 검은 베일에 싸인 채 오히려 불쾌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행복-없음>). 오히려 행복 같은 것은 없다고 재정의함으로써 체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의 실재에 좀더 근본적으로 다가갈 필요를 역설한다. 2011년의 3.11 대참사를 기록한 후쿠시마 원전 이미지를 뒤로 한 채 실내용 운동기구에 앉아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자기관리에 열중하는 일상의 모습에서 행복의 우스꽝스러움, 위험성, 모순의 속성은 주저 없이 드러난다.(<행복-우연성>)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려는 행복은 이율배반의 모습을 가졌다. 이해민선의 멸치산수-왈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냄비 물에 담긴 마른 멸치는 그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물속에서 헤엄을 치고, 물이 가열될수록 심한 요동에 몸부림을 떤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이러한 움직임은 쇼스타코비치의 장엄하고 비극적인 왈츠에 몸의 리듬을 맞춤으로써 더욱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데 그럼에도 왠지 모를 씁쓸함을 남긴다. 있는 대로 육수를 뽑아낸 멸치는 물이 다 증발하자 마치 한 장의 여유로운 산수화로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는 죽음에 죽음을 맞이한다. 모순에 모순을 거듭하는 삶의 과정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심각하다기보다 오히려 허탈한 웃음을 유발한다. 한편, 이해민선은 <House and Home> 에서는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마련한 일상의 주거 공간 안에서 통제되고 억압받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공동주택이라는 주거공간은 우리에게 익숙한 집이자 우리를 둘러싼 거의 모든 일상 세계를 압축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체성을 형성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사회 공동체를 형성해 나간다. 일상 속에서 구속과 통제는 우리의 몸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키는 동시에 그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을 비틀게 하며 통제의 살들을 덧붙여 나가면서 우리를 성장시켜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환영으로서의 영상이 아닌 실제 영상이 투사된 전시장 모서리와 같은 실재를 만났을 때, 체제에 의해 성장된 ‘나’들은 난관에 부딪치게 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이해민선은 체제 내에서 축적한 살들을 버리거나 그곳에서 좌절하기보다 그것으로부터 가벼운 날개를 만들어 이 체제 바깥을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은 오재우의 <물로 쓴 슬로건>에서 더 잘 드러난다. 전쟁과 같은 세계적 이슈를 포함하여 미군주둔과 FTA체결과 같은 국내의 정치적 문제와 심지어 등록금 인상처럼 일상의 이슈들조차도, 쉼 없이 다가오는 나의 치열한 하루하루 앞에 그것은 의미 없는 외침일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의 곳곳에는 우리를 일상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치열한 하루하루에 가두는 지배의 논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정물-오일>에서 보듯 세계적인 분쟁 앞에서 한편의 시를 읊조리는 것 마냥 위험하며 역설적이다. 그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일상적인 기호들, 예컨대 과자, 음료수나 담배, 책 같은 것의 상표에서 세계경제권을 둘러싼 국가간의 정치적 분쟁을 읽어낸다. 오늘날 개인은 곳곳에서 스마트한 소비주체로 불러들여지고 어디에서든 귀한 고객이 되어 자신의 선택적 취향에 의해 일상적인 상품들을 구매한다고 굳게 믿지만, 상품은 언제나 오일분쟁처럼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고 있고 그것은 지배와 권력을, 욕망과 착취를 위해 봉사한다. 궁극적으로 더욱 스마트한 소비주체가 되기 위해 매순간 매진하도록 강요받는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는 더 좋은 노동력-상품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꿈(Dream), 평화(Peace), 희망(Hope)과 같은 낭만적인 기호들로 제시된 상품을 구매하듯 자신의 꿈, 평화, 희망을 쟁취하기 위해 매순간을 투자하며, 그럼으로써 일상 속에 머물 수 있게 하고 아무런 문제없이 소비할 수 있게 하며 마치 그것이 오늘날의 미덕인 것처럼 보인다.
그토록 열정을 다해 우리가 쫓고 있는 것은 사실 무엇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며 단지 없는 것을 쫓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문은 박제성의 <공> 작업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선수들이 쫓는 공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작업을 통해 그러한 의문을 시각화한다. 공(空)은 행복이 될 수도, 성공이 될 수도, 1등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말그대로 비어있는 환상이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는 한편 오늘날 정치, 철학, 종교 분야에서의 대표적인 우상으로 대두되고 있는 오바마, 슬라보예 지젝, 달라이 라마와 같은 인물들에 주목한다. 그들이 시대를 진단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연설이나 인터뷰 영상에서 언어를 삭제한 후 손짓이나 한 숨 혹은 언어 사이의 빈 시간만을 모아 영상을 재구성하는데, 말이 사라지고 새롭게 구성된 영상 안에서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처한 상황의 다급함과 극박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만 한편으론 갑갑하고 불편하며 희화화 된 채 그려진다. 박제성은 이러한 작업의 제목을 <그의 침묵>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들이 그토록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인지에 대해 새삼 관심 갖게 하는 동시에 시대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수많은 이론가와 정치가, 종교인들이 우리에게 부재한 채로 존재하거나 의미 없이 다가오는 오늘날의 상황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옥인콜렉티브는 우리의 생활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삶의 조건, 사회적 조건들에 좀 더 깊숙이 다가간다. 이들은 실제로 사적인 거주의 영역이 재개발로 인해 공적인 삶 영역으로 옮아가게 되는 과정에 처함으로써, 체제에 의해 억압받는 일상을 발견하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일상 속에 많은 이들을 초대하고 서로 연대하며 새로운 예술가적 그룹을 형성한다. 이들은 또한 옥인인터넷라디오〔STUDIO+82]를 개설하여 불특정다수에게 일상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송함으로써 더 많은 이들을 이곳으로 초대하고 더 많은 이야기들로 커뮤니티를 구성해나가고자 한다. 이곳에서는 도시 계획과 주거 공간, 소비와 취향과 같이 전방위적인 일상적 주제와 경험들 사이에서 갖가지 이야기들이 오가는데, 예컨대 돈이 삶을 선택하고 규정하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돈 없이 가치를 교환하는 방식을 실험하거나 신자유주의 사회가 정의하는 자유에 대항하여 진정한 자유의 방식을 상상하고, 복지정책이 억압하고 있는 인권에 대해 토론을 한다. 체제에 대항하여 과격한 시위를 이끌거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선동하는 장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 삶을 존중하는 동시에 우리가 처한 사소한 삶의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개인이 처한 일상 속에서 자신의 호기심과 의심이 자발적인 참여와 강제하지 않는 연대를 이끌고 이것이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협업의 중요한 키워드가 될 때, 삶은 경쟁에서 벗어나 미세한 변화들로 진동할 수 있는데, 옥인콜렉티브는 그러한 상태를 경험하고자 한다.
개인이 소비주체이자 노동력-상품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면 현대인의 생활공간인 도시는 소비도시이자 관광-상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으로써 개개인이 경쟁구도에 내몰린 것처럼 도시 또한 또 다른 도시와 경쟁한다. 수많은 도시는 이미 문화산업에 의해 경쟁하는 관광지로 변했고 저마다의 캐치프레이즈로 관광객으로써 이방인을 불러들이며 이곳에서 더 많이 소비할 것을 강요한다. 김장프랙티스는 지역으로서의 많은 도시들이 자신을 광고하는 안내서에서 결코 그 도시의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모순을 발견하는데, 예컨대 그들은 인천시가 안내하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려하고 이국적인 이미지와 달리 지방의 쇠락한 공간으로서 차이나타운을 경험한다.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저마다의 도시 광고는 어딘지 닮아 있음에도 유일하다거나 특별함을 강조하지만 우리가 개별 도시에서 만나는 것 역시 상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곳에서 실제 삶과 연결된 새로운 지역안내서 만들기라는 어떤 실천을 행한다. 비록 그러한 실천적 행위에서조차 기존 체제에 의해 습득한 경험과 시선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그 실천은 무모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견고하다고 믿어지는 것들의 틈 사이를 발견하고 그것을 확장해가면서 자신들의 언어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노력이나 체제에 부스러기를 내려는 그들의 전략 자체에 이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와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에 대한 김장프랙티스의 해석과 의미의 관계망을 엮어나간 <안녕 없는 생활들, 모험들 개요> 작업 과정 역시 이러한 그들의 중요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지역으로 명명되는 수많은 도시들이 저마다의 캐치프레이즈로 문화산업에 열을 올릴 때, 삶의 공간인 도시는 또한 도시-삶-재개발과 같은 이름으로 경쟁구도에서 수많은 ‘낙후’된 것 혹은 ‘낙오’된 것을 쓸어낸다. 열악하고 노후한 도시환경을 정비하여 안락한 주거지 조성과 상권 활성화를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곳곳의 도시-삶-재개발은 수많은 철거민을 양산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최소한의 주거환경이나 생계 터전을 정부로부터도, 누구로부터도 보장받지 못하는 세입자들로, 갈 곳이 없거나 갈 수 없는 상황에서 퇴거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그 상황은 그들에게 말그대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이 상황은 철거민만이 감당해야할 비극이 아니라 오늘날 젊은 예술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우리들’이 처한 고통, 공포, 절망감을 이 상황이 대변하고 있으며 우리가 곧 철거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남긴다. 철거용역에 대항하며 그곳의 세입자가 되어 많은 젊은이들, 젊은 예술가들이 공연을 하며 함께 밤을 지새우는 철거 현장은 바로 지금 눈앞의 공포에 맞서고 삶과 죽음 앞에 심장이 터질 듯한 감정의 극한을 경험하며 또한 그 자체로 우리들이 노동해야할 현장이자 그것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쾌락이며 우리의 일상인 상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파트타임스위트는 전시장 내 13평 클럽을 만들어 생활의 공간이자, 노동의 공간이며, 쾌락의 공간으로서의 철거현장과 같은 삶의 재연이다. 이들에게 체제에 맞서는 방식으로서 삶은 피로 점철된 투쟁이기보다 행진댄스와 같이 사태를 지연시키는 운동성으로 혹은 고통을 덜어내는 예술적 승화로서 지속가능하다.
리슨투더시티는 도시의 삶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더욱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정부에서 추진 중인 4대강 사업은 친환경적 사업을 표방하지만 경제효과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서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 리슨투더시티는 4대강 사업의 홍보를 자처하는데, 마치 자신들이 하나의 여행사가 되어 투어상품을 개발하듯 4대강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연혁으로 정리하고 인쇄물을 배포하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시선을 끌고 기념상품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등 오늘날 삶을 관광으로 변환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역이용함으로써 자신들이 기획한 ‘4대강 투어상품’을 통해 강 주변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린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았지만, 그 안에는 목숨을 건 혹독한 노동과 치열한 경쟁이 늘 따라다니고 있었으며, 심지어 눈앞에서 펼치지는 파괴현장에 대한 자기분열을 경험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존재했다. 이들에게 보상이라곤 최소한의 생계유지비거나 자식의 대학등록금이며 혹은 그런 것을 포기하고 언제든 일을 관둘 수 있고 해고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경제성장이나 경쟁력강화와 같은 이름으로 국가와 기업은 여전히 국민과 민족을 불러들이는 듯하지만, 오늘날 호명되는 국민이란 ‘유연한 노동력’을 제공해 줄 개인들인 것이다. 한편 2011년 한 인간으로 하여금 309일 동안 크레인 위에서 고공투쟁을 벌이게 했던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정리해고 사태와 그를 지지하며 전국에서 몰려든 희망버스는 유연한 노동력 앞에 살고 죽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진 우리시대를 직시하게 한 사건으로, 리슨투더시티는 그가 살았던 크레인 위의 방을 재연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살아가야 하는지 물음을 던지고 있다.
2011년 일본의 3.11 원전사고는 국가와 기업이 호명한 국민들이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재해를 입은 잔혹한 참사현장을 전세계적으로, 실시간으로 증명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침↑폼은 원전사고가 일어난 지 한 달 만인 2011년 4월 11일, 방호복을 입고 후쿠시마로 향한다. 사고 이후 재해지역에는 복구 작업을 위해, 그리고 생존을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방호복을 입고 후쿠시마로 향했다. 그들처럼 침↑폼도 방사능에 노출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겹겹이 방호복을 착용하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질식할 정도의 숨 막힘이 온 몸을 에워싼다. 그들은 국가가 그토록 자랑하고 도쿄전력이 안전을 보장한 원자력발전소의 제1호 망루에 올라 하얀 깃발을 꺼내 펼치고는 붉은색 락카로 처음엔 일장기를, 그다음엔 방사능 마크를 그린 후 마치 백기를 흔들 듯 깃발을 흔드는 퍼포먼스를 행한다. 1945년 원폭투하에 의해 백기를 든 제국-일본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원폭투하를 계기로 자국민을 피해자로만 내재화했던 일본-국가는 3.11 이후 외부가 아닌, 국가 내부로부터의 참사를 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망루를 내려와 인접한 곳에 방호복을 입은 허수아비를 세움으로써 아직도 살아있는 후쿠시마의 수많은 노동-희생자를 상기하도록 한다. 침↑폼은 시부야역에서 펼친 또 다른 게릴라 퍼포먼스 <LEVEL 7 feat. Myth of Tomorrow>를 통해, 이 상황을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대중의 논쟁을 부추기며 예술가로서 자신들의 의무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문경원은 <박제>라는 상상적인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옛 기무사터라는 물리적 공간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관계시킨다. 그곳은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통의 장이었고, 한국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국민들의 생활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권력기관으로서 군림하게 되는데, 2000년대에 이곳은 이 시대의 문화맥락을 짚어낼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갈림길에 서 있다. 작가는 이 독특한 공간의 서사를 놓치지 않고 사실적 자료와 상상적 이미지를 교차시키며 풀어낸다. 웅장하고 짜임새 있는 영상의 전 과정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작업에서 가장 눈여겨 볼 지점은, 무엇보다 끄트머리에 덧붙은 왈츠를 추는 무용수와 이들을 중심으로 기무사를 둘러싼 현대 도시의 개발 현장이 교차하면서 드러나는 내레이션이다. 우리는 이렇듯 현재의 시점에서, 지난날의 ‘감시와 억압의 국가권력’이라는 서사를 수면 아래로 묻어두고 현재의 시점에서 ‘비로소 국민이 주체가 되어 자유로운 문화와 일상 그리고 역사가 연결되는 지금... ’을 맞이하고 있다. <박제>는 이 ‘지금’을 전개하지 않고 끝나지만, 누군가에 의해 현재의 모습은 새로운 명명과 해석을 달고 역사가 되어 서사 될 것이다. 과연 그 날의 오늘 이 ‘자유로운 문화와 일상’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