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공간 반디
2006. 4. 21 - 14. 30

강태훈


강태훈 - 수집과 분류의 논리

반복을 주된 방식으로 삼는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는 그야말로 동일한 것의 반복인 경우. 두 번째는 원래는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하는 다양한 사물들을 동일한 질서에 종속시키는 경우. 첫 번째는 사물들의 기계적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이거나 혹은 종종 전시장과 작업실의 공간적 차이를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물론 이 마지막 경우는 여기서 특별히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면 두 번째 경우는 반복이라기보다는 수집이나 분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수집이나 분류 작업은 단순히 동일한 것이 되풀이된다는 현상적 차원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 반복을 일으키는 구조나 질서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강태훈의 작업의 경우 두 번째에 속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에 수도꼭지를 부착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질문의 차원에 있다기보다는, 왜 서로 다른 사물들에 수도꼭지가 달려있어야만 하는가, 혹은 그런 작업을 유발하는 구조적 원인과 이 개별 사물들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는 차원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수도꼭지 시리즈 이전에 했던 작업을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오브제들을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서 동일한 공간 속에 압축하거나, 바닥에 나란히 늘어놓거나 하는 작업에서, 개개의 물건들을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수도꼭지’와 같은 매개물은 없지만, 사물을 분류하는 보이지 않는 ‘원칙’에 대한 관심은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런 관심사가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갖추고 나타난 것이 최근의 수도꼭지 시리즈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작업을 반복이라고 부르는가 수집 혹은 분류작업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것은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반복이라고 할 경우 같은 것이 되풀이된다는 방식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일차적인 것이고, 반복되는 사물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은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된다. 물론 반복의 방식 그 자체가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문화의 어떤 ‘기계적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 구조적 관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식의 기법은 앤디 워홀 이래 이미 무수한 작가들이 사용한 방법으로 그 클리세적 속성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시 말하면, 단지 ‘같다’라는 것만으로는 생산적인 의미를 담아내기 어려운 시대인 것이다. 강태훈의 작업도 그런 차원에서 해석해서는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 작가의 작업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모든 사물에 수도꼭지를 붙였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어떤 사물들을 선택해서 수도꼭지를 붙였는가 하는 차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구체적인 사물과 보이지 않는 구조 간의 관계는 겉보기보다 일방적이지 않다. 나는 오히려 작가가 선택한 사물들, 특정한 책, 그림, 동물박제, 구명대...같은 것이 개별적으로 갖고 있는 성격의 차원에 주목하고 싶다. 물론 이 말은 작가가 실제로 이 사물들에 일일이 의미를 붙여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다.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이 개별 사물들은 일일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작업 속에 적절히 배치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개별 사물의 ‘무의미’는 역설적으로 그것을 선택한 작가 자신의 ‘어떤 것’을 표현해줄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징후적인 차원으로, 이 작업 속에서 작가의 자리를 표시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표시 행위(혹은 그에 대한 인지)는 작업에 좀 더 풍부한 암묵적 텍스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원래 수집의 논리는 암묵적 텍스트를 가진다. 예를 들어보자. 반의 모든 아이들이 어떤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기에 더 이상 남들과 다른 어떤 것을 수집하기가 어렵게 된 어떤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찾은 해결책은 “다른 사람의 수집대상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모든 X-맨들의 능력을 흡수하는 X-맨의 존재처럼, 사물들을 연결하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의 게임 같은 것이다. 강태훈의 작업이 이미 품고 있지만 좀 더 강하게 드러냈으면 하는 지점이 이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수도꼭지라는 매개물을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 작가의 작업이 개념적이라는 차원에서, 즉 경험의 감성적 풍부함을 결여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은 나에게는 초점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작업이 개념적이라는 것은 전혀 단점이 아니다. 다만 그 개념이 어떠한 개념인가, 그리고 그 개념은 어떤 조형적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구조의 획일성과 개별 사물의 관계에 대해 강태훈의 보여주는 관심 그 자체는 큰 장점이다. 이미 클리세가 된 기계적 속성에 대한 언급이나 심지어 단순한 장식적 효과를 위해 반복을 선택하는 많은 작가들에 비추어볼 때 그렇다. 하지만 매개물의 너무 직접적인 노출로 인해 실제로 더 존재하고 더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 ‘보이지 않는 부분’의 깊이를 오히려 줄여버린 것은 더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보인다. 요컨대 작업은 좀더 ‘어려워도’ 된다. 오히려 사물들 위에 적어놓은 글자나 전시장에 적어놓은 문구들은 이러한 ‘어려움’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소화되지 못한 장식구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작가는 이 작업에 영감을 준 것으로 이야기한 개인적 기억이 매우 흥미로웠다. 작가는 초등학교 시절 매스게임에 동원되었던 기억을 이야기하는데, 더운 여름날 교사의 지시에 따라 획일적으로 움직여야 했던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 우르르 수도꼭지로 달려갔고, 그 때 수도꼭지의 이미지가 작가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기억은 “서로 다른 사물들에 동일한 수도꼭지가 달려있다“라는 겉보기의 차원과 정반대가 아닌가? 이 에피소드에서 수도꼭지는 획일성이나 억압의 이미지가 아니라 정반대로 일종의 해방의 이미지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결과물에서 반대의 의미로 둔갑하고 있다. 적어도 관객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나는 이 이 기호의 역전 혹은 ‘중층결정’이 매우 다층적이고 흥미로운 텍스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면을 좀 더 작업의 전면으로 이끌고 오는 것이 작가의 몫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조선령(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Tae-hun,Kang The Logic of Collection and Classification

Repetitious work is divisible to two categories. One is reiteration of the same thing; the other is putting a variety of objects in an order. The former is to accentuate mechanical attributes of an object, dissolving spatial differences between gallery and studio. (There is of course no need to discuss this last case here.) On the contrary, the latter is more appropriate to refer to as collection or classification, rather than reiteration. Either collection or classification is not derived from a mere repetition of the same thing, but from attention to structure and order. Accordingly, Kang Tae-hun’s work belongs to the latter category.

What is significant in Kang’s work is not meaning derived from attaching faucets to other objects, but questions like, why did he do it?; what is the structural cause of the logic?; and what are the relations inherent to each object. This significance is apparent in previous work in which he created diverse objects from similar materials, condensing them in the same place or displayed them in line. Although there is nothing in a faucet to offer further unity to other objects, his concern for an invisible law that classifies things is present in his work. In the faucet series this concern is expressed concretely.

What kind of work is ‘reiteration’, or ‘collection and classification’? This is a trivial but important question. Concern for which objects are repetitious is secondary to the way of reiterating itself. As mentioned above, a way of reiteration can apply ‘mechanical attributes’, which may be derived from concern for a thing’s logic. As this technique was used by many artists since the period of Andy Warhol, it is hard to escape from its cliches. In other words, and conversely, meaning cannot be conveyed simply by reiterating the same thing, Kang Tae-hun’s work is of no significance if interpreted this way. What is significant is not the fact that he attached faucets to all objects, but which objects he selected to attach faucets. This type of relationship, between concrete objects to an invisible structure, is not as obvious as it may seem. Focus could be moved to other objects like a book, picture, stuffed animal, and safety belt. This does not mean Kang should invest each object with a meaning: as each thing is without particular meaning, meaning can be spread throughout his work, in accord with the invisible logic of collection. This meaninglessness, however, may express what the artist has paradoxically. In other words, it may indicate his position.

The logic of collection is by nature based on an implicit text. For instance, a boy who cannot collect something because his classmates are collecting it, collects objects from the collections of others. In other words, if X-man absorbs Y-mans’ ability, it is like a game with infinite numbers. Kang’s work could foreground this basic idea. To do so, I believe, he should deeply question the use of the faucet. To do it, I consider, it would be much better not to reveal directly the medium of faucet. To criticize Kang’s work as merely conceptual and devoid an abundance of emotions is not my intention. Conceptual work is not always defective. What is only important is what the concept is and which formative language can be used to represent it. In this respect, Kang’s concern with relations between each object and uniform structure becomes the merit of his work, considering that a number of artists often refer to a mechanical attribute and employ a way of reiteration simply for a decorative effect.

The depth of ‘the invisible’ is reduced by exposing its medium too directly. A work of art is allowed to remain difficult to understand. But some phrases over the objects and in the exhibit hall may hamper this abstruseness.

Kang’s personal memory he explained as the inspiration of his work was quite interesting. His personal memory is about a mass game he practiced in his primary school days. All his schoolmates had to move in a uniform manner by the direction of a teacher. They thronged to the faucets during recess and at that time, the imagery of faucets was imprinted on his consciousness.

It is quite opposite to his work’s superficial images. This is why these faucets operate in this episode as an image of liberation, rather than as an image of uniformity or oppression. However, it virtually results from an opposite meaning, if seen from the viewer’s eyes. I consider the reverse of this symbol and its connotation appears multiple and very interesting. One of the tasks Kang Tae-hun has to assume is to draw this aspect to the fore of his work.
 
Cho Seon-ryon (Curator of Busan Museum of Modern Art)